실패 없는 인생(11): 고난에서 회복의 의미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시60: 1-12
한 나라를 침공할 때 양쪽을 공격하는 양면 전술이 있습니다. 적이 동시에 쳐 들어 옴으로 심리적으로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병사들을 나누어 싸워야 함으로 힘도 분산되고 집중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약한 곳이 먼저 무너지게 되고 전쟁에 질 수도 있게 됩니다.
오늘 시편의
머리말을 보면 비슷한 처지입니다. 북쪽에서 아람군대와 싸우는 동안 남쪽에서 에돔이 쳐들어 옵니다. 그러자 2절에서는 두 곳의 적들을 막기 위해 다윗은 자신의 병사를
나누어서 방어해야만 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마치 군대가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혼비백산한 모습이 3절에 나타납니다.
살다 보면 문제가 하나씩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생겨 너무 힘들게 만듭니다. 하나만 생겨도
힘겨운데 진이 빠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은 아프고, 본인은
멀리 출장을 가야 하는데 아내마저 급하게 병원에 입원하는 상황입니다. 더한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요.
특히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것이나, 더 상황이 악화되어 극한 절망을 맛보아야 하거나, 아니면 평생 지고 가야만 하는 일이 생기면 실망과 절망도 더 커집니다. 많은
성도가 이때 힘들어 하고 무너지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극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자신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뭔가 못마땅해서
자신을 이제 버린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내게 견디기 힘든 어려움과 시련이 오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나에게(만) 이런 고난을 주는가’입니다.
대부분
성도는 병이 나면 하나님이 고쳐 줄 것이고, 위험에서 빠져 나가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쯤 되면 만사가 싫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다른 성도들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딱히
위로해 줄 말도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 대부분 사람들은 원인이 있기에 그 결과로 고난이 온다고 접근합니다. 이것을 인과론이라 부릅니다. 죄로 인한 벌이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혹시 다윗도 밧세바 사건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혼내는 것 아니야?’라고 본문을 보는 분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는 무관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 잘못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 오곤 합니다. 오늘 시편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런 고난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고난 가운데서 보여지는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은 어떤지요? 대부분
고난을 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게다가 나의 죄와 허물 등에 집중하다 보면 고난의 이유를
찾지 못해 화가 나 있습니다.
화나면
해서는 안될 말이 튀어 나옵니다. “나와 하나님이 무슨 관계야! 하나님이란
단어도 입에서 내지마.” 이보다 더 심한 말도 나옵니다. 고난
중에 화난 나로 인해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 되심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 되셔야만 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도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고난이 옵니다. 다르게 말하면, 누구나 고난 가운데서도 진리가 선포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4절을
보면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깃발은 진리를 뜻합니다. 진리를 고난 가운데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를 버렸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설정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4절을 보면,
‘주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또한
고난 가운데도 나는 사랑 받는 자임을 5절에서 고백합니다. 고난
가운데서 상실할 수 있는 이런 진리를 흔들림 없이 성도는 고백해야 합니다.
고난은 저주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있다가도
사라지는 판인데 고난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내가 버림 받았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난 가운데 내가 던지는 질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응답은 반드시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이 세상의 고난의 모양은 각자에게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답은 하나로 동일합니다. 아픈 사람은 낫는 것이고
두려운 자에게는 담대함이 답인데 어찌 동일한 답으로 주어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까요?
그것은 회복이라는 답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문제가
해결되는 분도 있고 안 되는 분도 있을 지라도 성도는 이미 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는 자의 심령
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우리 마음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살았던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줍니다.
문제가
문제되지 않게 보는 것이 에덴에서의 인간입니다. 에덴의 모습으로 회복된 마음의 상태가 평강입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서 믿는 모두에게 예외 없이 주는 응답입니다.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병이 낫고, 돈이 생기고 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니 기도 응답이 안 오는 것이지요.
요14:27을 암송하기 바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삶 가운데 문제가 여전히 있어도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평강의 마음을 주시는 것이 회복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더 이상
고난이 괴롭히지 않습니다. 원망이 그치고 찬양이 나올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이고, 여전히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문제를 안고 살아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것이 성도가 회복해야 할 기도의 응답입니다. 이런 회복이 기도
가운데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