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없는 인생(4): 불신을 제거하는 삶
시 53:1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하세요?’ 물으면 ‘하나님이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인간이 판단할 영역이 아닙니다. 비유로 말하면, 부모의 얼굴을 못보고 태어난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게
생명을 준 부모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있다’는 것은 신적 존재를 인정하게 만듭니다. 진화론적 사고에서 출발하면 더 쉽게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단순한
무기물에서 출발하여 복잡하고 긴 과정을 거쳐 생명으로 진화했다 할지라도 출발이 되는 단순한 무기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물에서부터
출발했던, 우주의 먼지이건 아니면 아메바에서 시작했던지, 심지어
원숭이로부터 그 출발이 되었다고 할 때 인간이 아닌 것에서 인간으로 변화되게 하는 작용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생각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절). 과학적 주장 외에 이렇게 말하는
분의 대부분은 믿는 분들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성도나 불신자 사이에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경우도 있기에 그런 하나님을 무엇 때문에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신 보다 믿는 사람들이 더 나은 모습이 나타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믿는 그 사람을 직접 변화시키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거나 자신보다 못한 면을 보고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게다가 안 믿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할 텐데 마음의 평안도 없이 불안해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도대체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우선 믿는 우리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 나야만 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주 안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은 완전히 새로운 다른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외형적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던 한 강도입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 이 땅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게 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낙원에 있을 것을 허락 받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살아갈 시간이 허락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요.
세관원이었던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 절반을 나누어주고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나 갚겠다고 합니다(눅11:8).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재산까지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행 2:45).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행2:47). 예수를 영접한 성경의 인물들은 다 변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앞으로 바뀌게 될 다른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새로워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도덕적 차원에서 더 나아지는 다음 단계인 외형적 변화는 그 사람의 몫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며 예수 닮는 의지와 결단이 주어지는 성화의 과제입니다.
여기까지 두 가지를 확실히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안 변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외형적 변화는 보는 사람의 도덕적 수준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를 질타할 정도의 분들은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더 나은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엄청나게 바르게 산 불신자가 볼 때 살인자로 살다가 예수 믿고 며칠 바르게 살다가 사형 대에 오르는 그런 분들이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리고 예수 믿고도 무지막지하게 안 변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답답함을 떠나 무엇 때문에 예수 믿냐고 비난하고 싶을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이 있습니다. 잘 믿는 분들도 간혹 엉뚱하게 사고치는 것 보면 정말 ‘하나님은 없어’ 라고 까지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가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두 가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의 연약한 모든 것을 모르고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엉망인 나 때문에 하나님 이름에 먹칠까지 당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셨기에 내가 변하지 않는 것 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당하는 우리의 저질스런 모습보다 더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믿고 변하지 않는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은 대관절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반대로, 믿지는 않지만 믿는 우리보다 더 바르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이 주제는 정말 중요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예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두 벽이 있습니다. 너무 더러운 오물이 범벅이 된 시커먼 벽을 내 힘으로 내 방법으로 지우개로 지우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너덜너덜해지는 보고 결국 포기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제시했지만 믿지 않는 분들의 모습과 세상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한편,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을 인정하고 완전히 새롭게 해 준다는 말을 듣고 믿어 봅니다. 정말 깨끗해진 벽을 맛봅니다. 다시는 나쁜 것을 칠하지 않고 살기를 결단하며 내 속에 함께하는 성령님의 도움까지 받으며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육신을 가졌기에 오물을 다시 벽에 묻힙니다. 그래도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요일1:9절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아버지의 인자함을 믿고 나아가 “주님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라고 자백만하면 용서받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머리카락만큼 변했다면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과학이 발달되어 머리카락을 잘게 나눌 수 있는 나노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시각이라 저는 봅니다. 그 조그만 공간에 엄청난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나의 변하는 모습을 사랑하고 인정해 주십니다.
믿는 성도는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져 하나님 영광 가려도 주님 붙잡고 따라다니며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완전한 변화를 영화(glorification)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죽을 때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아쉽게도 예수 믿고 변화된 내면의 본질의 모습을 못 봅니다. 게다가 정말 머리카락만큼 변한 우리의 성화를 인정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분들은 그런 성도를 구원해 준 하나님이 싫고 믿어도 불완전한 우리가 싫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구원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사람들 눈 높이에서 좀더 도적적으로 바르게 사느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 허덕이는 인간을 구할 계획을 세운 하나님을 인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구원자로 보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느냐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세상이 요구하는 수준에 따르지 못해도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보며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도 구원만큼은 쟁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세상도 알아야 할 것은 예수 믿는 성도가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선입견과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이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연을 통해 우리의 양심을 통해 그리고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말씀을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인정하는 올바른 신앙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온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