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4): 저주를 이긴 십자가 

갈 3:13-14



여기 계신 분들의 한 공통점이 있다면 디즈니 만화 영화 세대일 수 있습니다. 많은 만화 영화가 나왔는데 그 중에 저주로부터 풀려나는 주제의 영화들이 있습니다. 기억나는 것 중에 처음으로 백설공주(1937), 미녀와 야수(1991) 그리고 좀 더 반전을 더하는 겨울왕국(2013) 등이 있습니다.

 

영화들의 스토리는 물론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저주를 풀 수 없어 고통 받는 모습들이 생생합니다. 그러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저주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기쁨을 되찾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원래 삶으로 돌아가는 회복의 모습이 피날레를 장식함으로 감동을 줍니다.  


바울 역시 본문 13절에서 저주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합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했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은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가장 쉽게 저주에서 구해 주셨습니다로 번역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저주에서 벗어났다면 먼저 저주가 우리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저주들이 사라지고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지 않던 우리들에게 있었던 저주들이 어떤 것들입니까?’라고 물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또한 기쁜 일입니까? 이것을 모르고 그냥 예수 믿는다면 너무 슬픈 일입니다. 믿기 전과 별 다를 바 없이 그냥 교회에 다녀서는 안 됩니다. 주시는 복을 요구하고 누리며 사셔야 합니다.

 

긴 저주들의 목록들을 살펴 보실 분은 신28:16-68을 보면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런 저주들로부터 벗어 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를 더 이상 저주가 해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13절을 자세히 보면 그 저주들은 율법의 저주’ 라고 말합니다대관절 무슨 뜻입니까? 율법이 가진 속성이 인간에게 미치는 악한 영향입니다. 율법 그 자체가 저주를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지만 못 지킬 경우 범죄가 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된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사 45:7절을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새번역은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현대인의 번역은 축복도 하고 저주도 하여라고 번역합니다.

 

저주라는 실체를 만드신 분과 저주를 행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말씀합니다. 이 두 가지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실 수 있고, 마지막 심판 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천사나 사탄이 저주를 만들고 행한다면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가 될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등한 영적 존재는 없습니다. 천사나 심지어 사탄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서 사탄은 가장 마지막이며 최고의 저주인 불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슬슬 인간에게 임한 저주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기를 포기하고 실망하고 낙망합니다. 두 가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저주가 누구에게 임하느냐를 모르는 것입니다. 29:11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저주)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45:7에 의하면 저주 그체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29:11에 의하면 그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복의 대상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아브라함의 자손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지금 믿는 우리들이라고 갈 3: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그러므로 저주의 대상은 예수를 믿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믿는 우리 조차도 저주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것은 속이는 자요, 거짓말쟁이(12:9; 8:44)인 사탄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나머지 질문이 남습니다. 첫째는, '예수 안 믿을 때 받았던 저주는 예수 믿고 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가?' 입니다.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라고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저주가 우리를 해 할 수 없습니다. 선포하십시오. 확신하십시오.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구원받아 복을 받는 대상으로 바뀐 사실을 하나님 말씀은 진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믿고 난 뒤에도 저주 같이 느껴지는 것들이 내게 발생하는데(고난)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저주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징계일 뿐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로부터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12:5-11).

 

그래서 회개를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성도는 회개하기만 하면 어떤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80:3절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돌이킨다는 의미는 죄로부터 돌아서게 한다. 즉 회개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회개가 하나님 앞에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4절에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기도 응답이 길어지는 모습이 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였다.’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그럴까요? 우리 죄가 너무 크고 많아 더 철저하게 회개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 배신한 베드로에게 그대로 갚아주려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향한 확고한 사랑이 그에게 필요했고 그의 결단이 요구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80:7절은 성도의 고난에 대한 목적을 밝힙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회복과 구원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주가 아닌 복을 다시 누리게 하는 회복의 십자가입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몰고 갈 모든 저주를 이긴 놀라운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더 이상 저주는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 놀라운 복을 믿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