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3): 성령이 보여주는 십자가 

3:1-3; 16:7-8; 13



사순절이 시작되고 십자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먼저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는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들은 살리신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예수의 종 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먼저 자신을 살리신 분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살아난 그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시작부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드럽지 못합니다. 굉장히 강한 어조로어리석다라는 단어조차 구사합니다. 어떻게 들으면 불쾌하게 들릴 정도로 바울답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태도에 의도가 있음을 보입니다.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1장부터 언급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한 거짓 복음에 속은 교인들이 생겨서 바울은 격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바른 복음을 알지 못하면 질타를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하기 전에 십자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시간이 없게 만들고 그리고 너무 쉬운 것 같은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아는 성경공부나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십자가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3:1절에꾀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거짓말하는 자에게 속은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이 눈 앞에 밝히 보이는데 어찌 이런 일을 당하는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바울은 그들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을까요? 바로 이어지는2절이 답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명확히 말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그것을 들은 자들 모두는 성령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이 필요함을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지식은 지식으로만 끝이 납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 되게 하시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붙잡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바울 자신도 직접 주님의 십자가를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밝히 본다고 말합니다.

 

성령에 의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1절은 수동태 문장이 사용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겨날 때부터 성령은 우리들에게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여지게 한다는 것입니다(NIV: “Jesus Christ was clearly portrayed as crucified”).

 

이것을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도들에게는 성령의 영감(inspiration)과 계시(revelation)를 통해 모든 의미를 명확하게 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반면, 기록된 성경을 대하는 우리들에게는 그 의미를 밝혀 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16:13절에 의하면 주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구주로 오셔서 섬기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모든 사건의 의미를 더 깊이 알 수 있게 성령이 역사 하신다는 뜻입니다.  

 

바울 자신은 골도다 현장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성령에 의해 계시로 십자가를 선명하게 봅니다(1:12). 골고다 십자가와 지금 내가 보는 십자가와는 시간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이어서 이 천년 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지금 현재의 사건처럼 선명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십니다. 아무리 큰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아무리 긴 시간을 주님을 떠나 방황해도 상관 없습니다. 성령은 그 시간과 거리를 이어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분명히 보게 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해 주십니다.

 

결국 성령 없이는 우리를 위해 보혈을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3:3절에 바울은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말합니다. 성령 없이 인간적인 눈으로만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그 성령이 언제 나에게 오느냐는 것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사도행전의 기록은 언제라고 구분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 예수를 구주로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임한 성령을 내가 언제 확실하게 인식하느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믿기는 하지만 완전한 순종이 내게서 없을 때에는 성령은 내게서 전적인 주인의 삶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매일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는 삶은 주님의 십자가를 매일 볼 수 있게 하는 확실한 비결입니다.

 

바울은 고전15: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매일 죽는 사람에게 성령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주님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성령 없이 보는 십자가는 단지 범죄자를 죽이는 처형 도구에 불구합니다. 성령 없이 바라볼 때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그저 죽어야 할 사람들이 죽는 장소에 불과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당연히 내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었다는 사실도 가슴져려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듣다 보면 내 마음을 감동시키는 날이 있습니다. 수 없이 들었던 말씀,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 확실히 믿어지기 시작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에 십자가의 예수를 정확히 보는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십자가는 달라질 것입니다. 내 경험과 지식으로 바라본 십자가가 아니라 성령이 비쳐주는 십자가를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과 함께 보는 십자가는 3가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나의 죄를 보게 하고,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죄 없다 함을 받는 의를 발견하게 되고, 죽음 이후 심판이 있음을 두려워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이 모습을 요16:7-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에게 오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죽음과 부활을 믿게하는 십자가를 보여주십니다.   


육신의 눈이 아닌 성령이 보여주는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은혜가 넘쳐나는 풍성한 사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