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2): 내가 죽은 십자가 

2:20; 6:6, 12-13


십자가 시리즈를 사순절에 이어가고 있습니다. 꼭 말씀을 나누어야 할 주제가 바로 오늘 제목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주님이 죽은 자리로만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만 붙잡고 감사에만 머물게 됩니다. 성도는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본문20절의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에 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인해 주님의 십자가가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십자가에서 내가 함께 한 십자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바울의 고백에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직접 관여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 곁에 있지도 않았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갈2:20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로6:6에 있습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다시 우리가 죄에서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것을 로6:12-13절은, 좀더 자세히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죄가 나를 지배하여 유혹에 넘어지는 삶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몸을 내어주어 죄 짓는 불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몸을 드리는 헌신과 섬김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확실한 의미는 예수 믿고 변화된 삶의 나타남입니다. 이제 정말 내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는지를 테스트를 해보고자 합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동료들에게,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다른 성도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남의 형편은 상관없이 내 주장만 하며 사는지요? 억울해서 화나는 상황에도 분을 참을 수 있습니까?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 원망보다는 용서하며 사는지요? 상대를 먼저 배려하려는 부부의 삶이 가정에 있는지요? 공동체를 위해 싸우기 보다 화평을 추구하려는 자세가 있는지요?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또는 될 때가 있고 안될 때가 있습니다.’그렇다면 아직 내가 십자가에서 안 죽은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아직 내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면 죽을 준비가 되셔야 되고 실제 죽어야만 합니다.

 

아니 그러면 왜 내가 꼭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답이 발견됩니다. 내 속에서 주님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십자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속에서 살아야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기 전에 자연인으로서 참고, 용서하고 사랑했던 차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시간을 주님을 위해 남을 위해 사용합니다. 내 주장 내 고집만 피우는 사람이 남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남의 잘못을 쪽집개로 뽑아내는 사람이 타인을 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성화를 이루어 가는 성도는 서로의 약점을 볼 때 용서하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에게서 주님의 성품이 안 나타날 때 쉽게 평가합니다. 저 사람 이렇다 저렇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나도 주님의 성품이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알게 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학교나 직장이나 결혼 생활에서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그분들 가운데 어떤 분은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남이 열 받는 일에 자신은 잠잠한 사람이 있습니다(공감부족).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성품 자체를 좋다고 말하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상대방은 다 나쁜 것이 될까요? 유전입니까?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주님이 사심으로 나타나는 성화된 나의 인격이 아니면 그것조차도 변화 되어야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태생적으로 좋아 보이는 성품을 가진 사람도 실수 하기 싶습니다. 부부생활에서 상대와 비교가 되고 스스로 낫다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냉소가 나오고, 그 냉소는 상대방을 자극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화나게 만들어 화 안내는 자신은 승리했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런 인격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아무리 타고난 좋은 성품이 있다 해도 그 사람 역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좋은 성품이 남을 감동시키고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머리로는 이해가 갑니다.

 

모든 성도가 말씀대로 멋지게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잘 안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 내 자아를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부부 경우에 한번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툼을 하다 부부 중 한 사람이 갈 2:20을 기억합니다.

 

그리고당신은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죽은 사람으로 사세요.”이 말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듣는 상대는 화가 납니다.‘당신이 참으세요라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상대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죽은 나와 살아주는 상대에게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로 6:6절에서 찾도록 하겠습니다.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중요한 것은안다는 단어입니다.‘안다는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아는 것을 지속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고백(credo)입니다. 억울해서 화나고, 배반당한 자리에서 내 입술로 나는 죽었다고 반복해서 말하십시오. 그 순간 내 귀에 그 사실이 들려 옵니다. 그러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깁니다. 다음은내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으리라는 결단이 생깁니다.

 

주 안에서 이루어진 결단은 반드시 성령이 움직여 변화시킵니다. 어떤 사실이 내 속에서 의식적인 인식만 준다면안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은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맛보아 알게 된다는 체험의 뜻입니다. 상대가 열 받게 만들어도 인화점이 높아져서 점점 더 오래 참습니다.

 

반대로, 전에는 나보다 못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보면 나는 당신보다 더 잘 참아라고 은근히 비난하며 교만했는데 그것조차도 멈춥니다. 이것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살아 역사하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사순절에 이런 삶을 위해 도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