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주일: 복 받기 원합니다
창49:1-7, 28
성도는
복 받기를 원하셔야 합니다. 너무 한국교회가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비판을 받다 보니 마땅히 구할 복 조차도 구하지 못하는 나약한 성도가 되어 있습니다.
복 이야기 하지 않는 교회가 더 성숙된 교회라는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 주기를 정말 원하기 때문입니다(예화소개).
첫째, 복은 나중 우리에게 다가올 일을 미리 듣는
것입니다. 1절에 야곱은 죽기 전에 아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도 자식을 축복하면서 이 미래의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18, 24, 25,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 이런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이기에 성경은 그들을 죽이라고 까지 명령합니다(신18:10-11). 앞 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직 시간을
다스리고 만드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인간이 감히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향해 나중에 일어날
하나님의 계획을 이미 듣고 알고 있습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이 땅을 떠나 죽음 이후에 관한 계획까지도 이미 말씀해
줍니다.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모든 성도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 구원은 마 25:46절에 의하면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생은 계 21:3-4절에 의하면, 눈물도 고통도 없는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보다 더 확실히 우리의 앞 날을 이야기 해주는 어떤 신이
있습니까? 마6:25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공중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주님이 입히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든 염려를 내려 놓으시고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는 성도만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복은 각자의 분량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28절). 복은 그 사람의 능력을 넘어 갈 수 없습니다. 너무 과하면 넘쳐나는 것을 감당 못하여
사치와 낭비로 살아갈 것입니다. 한편, 모자라면 늘 만족하지 못하여
그것만 추구하는 비극적인 인생이 이 땅에서 시작 되고 펼쳐지는 것입니다.
둘 다 복을 받는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살면 됩니다. 두 달란트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가진 자도 열 한 달란트 남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공통점은 주신 것의 두 배만
남겨 옵니다. 주님은 그들을 칭찬합니다.
두 배만 남기면 칭찬받는 것일까요? 다섯 배는 왜 안되고 백 배는
왜 안될까요? 주님의 마음은 남기는 그런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충성스런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충성의 의미는 어떤
의미일까요?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 주인 앞에
나아갈 때 그대로 한 달란트 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살아갈 능력을 주셨는데 주를 위해서는 그 재능들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받은 것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산 것뿐입니다.
이 땅에서 열심으로 살아가지만 그 삶이 주를 위한 삶을
투자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겨온 다른 두 달란트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두 개의 달란트는 인생을 살도록
주시는 것이고 그 주신 두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살 때 두 개를 더 얻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남겼다’는 의미는 주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나에게 준 물질과 재능과 명예와 시간을 사용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 코넬한인교회 성도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신 것을 주를 위해 사용하여 주님 앞에 설 때 ‘두 배를 더 남겨 왔습니다’를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복은 자신들이 깨드리는 만큼 손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야곱의 아들 가운데 르우벤만이 누리지 못한 복을 언급합니다. 르우벤은 장자로 모든 형제들 보다
뛰어나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온 죄를 범하게 됩니다.
아비의 첩과 관계를 가진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복을 차단하십니다. 그가 장자이긴 하지만 그 탁월함을
나타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장자역할은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이 맡게 됩니다.
그리고 남유다는 유다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현재의 선택에 의해 복과 저주는 결정됩니다. 그 예를 다시 시므온과 레위에서
봅니다. 두 형제의 잘못된 선택이 있었습니다. 두 형제의 혈기는 여동생
디나 사건 후 세겜 사람들을 속여 멸절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아비 야곱에게 묻지 않아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이 나뉘어지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리라고 7절에서 말씀합니다. 말씀대로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으로 레위 지파의 일부가 북이스라엘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악정으로 많은 레위인들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과감한 결단을 그때 하게 됩니다.
다시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며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주는 저주되게 하는 행위가 이어질 때 저주가 될 뿐입니다. 돌아설 때,
성도가 회개할 때 저주는 더 이상 저주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를
둘러싼 운명이라고 말하는 저주들은 이미 끊어진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그 복을 계속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주신 것에 만족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 죄 짓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우리의 몫입니다. 내게 준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두 개를
더 부어 주시는 이 땅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2018년도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개인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