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4): 천국 가는 진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1: 1-5, 9-14
성탄 주일은 참 좋습니다. 한 교회를 다녀도 한 자리에 온 성도가 모이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주님 오신 성탄을 맞아 온 성도가 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또 성탄은 선물을 주고 받는 즐거움이 넘쳐서 좋은 날이기도 합니다.
저희 집에는 아이들만 선물 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도 부모들에게 선물을 하도록 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은 어떤 선물을 받았어요? 아빠 엄마에게 선물은 다들 했지요? 아직 자녀가 어려서 못 받은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허그와
뽀뽀라도 선물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네요.
왜냐하면 아이들만 선물 받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탄은 가족 모두가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께 선물을 당연히 해야 합니다.
얼마나 큰 선물을 내가 받았는지를 알면 알수록 내가 드리는 감사도 달라지게 됩니다.
이미 우리가 보낸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이 땅에서 얻은 복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성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있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셨을까 참 궁금합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9절에서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선물은 ‘참 빛’입니다. 좀 우습습니다. 이미 세상에 엄청난 빛들이 발견되어
삶에서 이용하고 있는 시대에 또 어떤 빛이 필요하기에 그것을 선물로 주신단 말입니까? 참 빛이라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저는 산을 좋아해서 방학이면 혼자
높은 산을 찾곤 했습니다. 대학시절 어느 날 좀 오랫동안 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별한 장소를 찾아 가려고 용기를 내어 남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지도 상에 표시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당연히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밝은 대낮인데도 말입니다. 몇
시간 헤매다 어두워질 때 즘에 겨우 길을 찾아 다행이긴 했습니다. 어둡지도 않았는데 길을 잃어 버렸다면 저에게는
또 다른 빛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참 빛도 그런 의미입니다.
제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확실히 표시된 지도입니다. 나름대로 지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산 속의 길까지는 표시되지 않았기에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진정 알기를 원하던 질문에 대한 정답이 참 빛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빛(정답)을 찾고 있었을까요? 5절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추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어둠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방에 불이 났는데 캄캄하다면 빛이 있어야만 밖으로
나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캄캄하게 만들었던 이 세상의 어둠은 무엇이었을까요?
4절을
보기 바랍니다. “그(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의 어둠은 죽음/사망’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어둠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사람이 죽는 것이며,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정답이 바로 참 빛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 많은 종교들은 죽음에 대해
가르쳤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 본성 속에 하나님이 심어
둔 두려움 때문입니다. 진짜가 아니면 계속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생기도록 하나님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종교들이 생겨나서 자신들이 답이라고 가르쳐도 정답이 아니기에 사람들 속에 두려움은 여전히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경우, 사람이 죽으면 다시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착한 행위를 하느냐가 다음 세대에
어떤 존재가 되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신이 되지 않으면 (해탈) 계속 그것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어느 순간에 우연히 하늘에
구름이 생기듯 존재가 나타났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라는 신의 개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불교에는 신이라는 개념 조차도 없는데 왜 불교에서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간 스스로
신이 되라고 말할까요?
또한 사람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육체를 가진 살아있는 사람이 육체가 없는 신이 된다고 하는데 육체를 가진 사람을 어찌 신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인간이 신이 되는 그 수준을 누가 정하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정하면 인간이
만든 신일 뿐입니다.
불교는 죽음을 단지 생명이 없어지는
것으로만 서술합니다. 그 원인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참 좋습니다. 걱정 없이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그렇게 죽음에 대해 걱정할까요?
죽음 이후에 뭔가 있음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우리 속의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잠언(1:7)은‘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하는 것)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지식의 근본이라는 의미는 ‘모두가
알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알아야 되고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죄는 미워하며, 죄
지은 사람들을 반드시 지옥으로 보낸다는 하나님의 법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법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으면
늘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죽는 모든 인간은 그 법에 따라 영원한 사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서운 법만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하신 무한한 사랑을 또한 품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잘못할 때 혼나야 하는데도 아빠 엄마가 용서해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랑이
죄 지은 인간을 지옥에 보내지 않고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십자가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없습니다. 또한 있어서도 안 됩니다.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유는 다른 것을 하게하며 인간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나를 대신해 죽으시고 살아나서 나를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만드신
그 사실만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구원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나에게 천국 가는 진짜 길을 보여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는 성탄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