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0): 겸손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20:20-28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어떻게 하면 잘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론도 다양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는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치십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겸손에 대해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겸손은 정말 듣지도 않을 것 같은 세상적 욕심을 품은 사람들을 가까이 오게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은 20절에서 한 어머니의 출현으로 시작합니다. 건장하게 잘 자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보며 부모는 흐뭇해했을 것입니다. 기대도 남들보다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는 이들이 어부로서 별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라 언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가운데 광야에서 외치는 한 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세배대의 아들들도 점점 집안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부모들도 그가 누구인지 확인했을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하늘의 소리를 더 갈망하고 있던 때입니다. 세례 요한의 소리는 광야에서 사람들을 불러 내었습니다.

 

피가 끓던 젊은이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이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지금까지 어떤 선지자들의 말씀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들보다 사람들의 인기를 끈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병자들이 낫고 먹을 거리가 나오고 그분만 따라 다니면 평강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기다리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갈릴리 호숫가에서 자신들을 주목하며 부르시는 주님을 보고 두 형제는 따라 다니기 시작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두 형제에게는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부모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안심이 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좋은 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제자로 삼는 다는 것에 더 호감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아들들의 스승이 메시야이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시골 어부 출신이지만 두 아들들이 회복될 나라의 한 자리에 오를 것은 당연합니다. 갑자기 부모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이 자식들의 출세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드디어 치마바람을 일으키며 세상적 욕심으로 가득 찬 한 여인이 주님께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둘째. 주님께 나온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겸손을 들을 때 먼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차이가 있음에 놀라고 변했습니다. 놀라야만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는 당당히 주님께 나아와 자신들의 두 아들이 하나님 나라의 좌우편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요청합니다(20-21). 그러나 주님은 22절에서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는냐?’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출세를 위해 주님을 찾아온 살로메는 주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기가 막힐 정도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면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임을 늘 잊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삶을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찾아온 이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먼저 주 앞에 나아갈 때 죄로 인해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내어 놓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자신을 덮어주실 것을 먼저 구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동물을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은 모든 부위를 각을 뜨게 합니다. 이 모습은 죄로 인해 나는 이렇게 철저하게 죽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도 이것을 인정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 죽은 주님의 보혈이 나를 대속했다는 믿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예배 전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죄를 고백하는 시간은 철저히 지켜져야 합니다. 이 절차가 무시되면 성도는 자신의 것을 먼저 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서기만 하면 세상적인 요구가 먼저 튀어 나오게 됩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 만을 요청하는 시간이 됩니다. 타인을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내 가족, 내 바램, 내 상처에만 집중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겸손을 배울 때 너무 자신들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에 진정 놀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가르친 겸손은 그녀를 나중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식들만의 성공을 바라던 살로매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가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아무도 찾지 않는 마지막 순간을 주님과 함께하기 원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무덤까지 찾아 온 여인으로 변합니다.

 

섬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야심에 찬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살로메의 두 아들 역시 변했습니다. 야고보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되어 주님을 최고로 섬기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맨 마지막까지 남아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로 교회를 섬깁니다. 특히 마리아를 십자가 밑에서 부탁 받고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시는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년에는 젊은이들도 견디기 힘든 밧모섬으로 고독한 유배를 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받고 위기 가운데 있던 초대교회들을 소망으로 회복시키는 위대한 사도로 섬기게 됩니다.

 

셋째, 변화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겸손은 지금 보다 나를 낮추는 것을 원합니다.살로메는 세상적으로 교양있는 여인입니다. 20절에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주님께 절한 뒤 뭔가 구할 것이 있다는 의사를 표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구하느냐고 질문할 때까지 기다리다 당차게 자신의 요구를 주님께 요청합니다(21).

 

이 여인은 갈리리 뱃사람의 아내였습니다. 비록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예의와 교양을 가진 여인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겸손은 세상적인 교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3절 상반절처럼 주님의 잔을 함께 마시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지금보다 더 낮추는 겸손은 몸 된 주님의 교회를 섬겨나갈 때 성도에게 요구되는 실제 희생입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것을 손해 보는 것입니다.

 

바쁘고 힘들어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드려지는 나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함께 신앙생활할 때 주님을 대하듯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를 죽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열심을 다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지금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겸손해 지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낮아질 때 우리는 변합니다. 일 년 전보다, 한 달 전보다, 일주일 전보다 우리는 더 겸손해 져야만 합니다.

 

기도 가운데 자꾸만 달라고 하지 마시고 오늘은 조금 뒤로 물러나 낮은 자로 주님께 이렇게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원합니다.” 내가 일하는 회사나, 학교나, 직장에 대해 더 요구사항을 말하기 전에 이것까지 준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일생을 통해 주님 앞에 가기까지 최고로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겸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은 겸손을 거침없이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세상적 야심에 찬 사람들일지라도 결국 하나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누려 정말 주님을 따르는 자라는 소리를 주님 앞에 설 때 여러분과 제가 듣기 원합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가장 잘 났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도 자신의 신앙생활을 자랑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만이 더해갈 때 죄가 더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보다 더 겸손해 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 힘, 내 경험, 내가 가진 위치와 지식, 내 물질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높여드릴 때 우리는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낮은 겸손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겸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쟁보다 화해를 만들어 가는 삶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남들보다 내가 더 알고 내 생각이 더 낫다는 자랑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인가에 대해 논쟁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18:1). 그런데 살로메가 와서 주님께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나머지 제자들의 화가 폭발합니다(24).  

 

이 두 형제의 어머니는 자신들의 아들들의 출세를 당당히 주님께 요구합니다. 나머지 제자들 사이에는 자신들의 부모는 부탁하지도 않았다는 부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당당한 살로메의 태도에는 남편의 재력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에서나 특히 막 1:20절에 보면 세베대는 자신의 배를 가지고 있었고 품꾼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 당시 상당한 재력가 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도 자신처럼 출세하도록 밀어주려는 욕심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다른 화가 난 제자들도 모두 각자 자랑할 것은 있었습니다. 먼저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마 16:16절에서 위대한 고백의 수제자였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이 이름까지 고쳐주며 천국열쇠를 허락 받은 자입니다. 마태는 당시 세리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전까지 그는 엄청난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그의 자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요한복음에 의하며 처음 주님을 따른 제자였음을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가롯 유다는 재정을 맡은 자로 역시 자랑할 것은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누구 하나 잘 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잘났는데 자신이 더 잘났다고 불을 지르니 분쟁이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사람과의 불화는 영적 교만에서 나옵니다. 이 영적교만의 근원지는 율법주의입니다. “내가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한다. 내가 더 많이 금식하고 남을 돕고, 더 시간 내어 주님께 충성한다는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뭔가 실수하고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은근히 부각시키는 교만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다 부르시고(25)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한 긴 싸움을 매듭짓는 말씀을 26-27절에서 던져줍니다. ‘종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큰 자이며 으뜸이다라고 결론 짓습니다.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직접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28).

 

물질과 명예와 자신의 위치로 인정받는 세상 가치관에 빠지면 우리는 교만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 때문에 더 나를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겸손한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