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9): 온유한 자를 원하십니다 

5:5; 26:1, 12-18; 37:9-11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를 원하십니다.”


먼저 온유의 뜻부터 찾아 보고자 합니다. 원어는 πραΰς(프라우스)입니다. 이 단어는 meek, mild, humble등으로 번역되며 성격이 얌전한, 부드러운, 겸손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유함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경의 인물은 모세입니다. 12: 3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히브리어, NIV: 겸손)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에 대한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모세의 모습은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나 왕궁에서 40년이 넘게 왕자의 신분으로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모든 예의와 예절을 훈련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 훈련은 그를 배운 대로 대처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격노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온유함이란 우선적으로 사람의 가르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살인 사건 이후 그는 광야로 도망쳐 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불 같은 성격은 또 한번 나타납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산에서 내려왔을 때입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아론을 세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 합니다. 백성들이 신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32:4). 이 광경을 본 모세는 하나님께로 받은 돌 판을 땅에 던져 버리는(32:19) 격한 분노를 나타냅니다. 온유는 나를 격동시키는 어떤 환경에도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보입니다.

 

한번 더 모세는 광야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온유함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20:8절에 의하면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백성들 앞에서 바위에 대고 말 만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나님은 일러줍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 앞에서 화난 모습으로 두 번이나 바위를 지팡이로 내려치게 됩니다(20:11). 과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분명히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그의 격한 감정을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행동에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당하고 있었고 자신의 감정만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자신의 내면의 격한 감정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외형적인 모습도 온유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과연 온유에 대한 주님의 마음에는 어떤 다른 것이 자리잡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이제 온유의 의미를 담고 있는 πραΰς(프라우스)라는 단어가 삶에서 어떨 때 사용 되었는지 보고자 합니다. 거친 소나 말이 마침내 주인에 의해 길 들여질 때 바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주인 되신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진 사람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 같은 성격도 주님의 손에 의해 길들여 질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일 것 같은 격한 감정도 주님의 손에서는 온순한 양으로 변합니다. 폭풍 같이 일어나는 격한 감정들이 말씀 앞에서 평온을 되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변화시켜서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 개인의 수련으로 만들어지는 인격수양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오직 주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성령의 작품입니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인격 수양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고 부드러움과 여유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격적인 행동은 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 순종할 수 없는 고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철학, 자신이 믿는 신념에 찬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고집 센 사람들이고 가장 안하무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무시할 수 있는 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리 세상적인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그들은 무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인정하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5:23절에서는 성령의 9가지 열매중의 하나로 소개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우리 인간을 통해 나타내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신앙생활 가운데 나타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점차 자신의 내면적 자아의 교만을 벗어 버립니다. 점점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자주 대면한 사람입니다( 12:8). 하나님을 만날 때 그는 작아지는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팡이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느낍니다. 자신이 배운 왕궁에서의 교육과 광야 40년의 경험조차도 쓸모 없음을 안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물 한 방울 만들어낼 수 없었습니다. 무능력하고 초라한 자신을 진정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주시지 않았다면 내 손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지위, 편안함, 행복 모두 주님의 손에서 온 것임을 깨닫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낮게 취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잠잠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모세에 대해 온유를 쉬운성경은 겸손으로 번역).

 

다음으로, 왜 온유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함입니다. 개역개정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쉬운성경은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땅을 물려 받을 것이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NIV, NASV, KJV, SMS “they will(shall) inherit the earth.”라고 번역합니다.

 

문제는 세상의 땅은 경쟁과 투쟁으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역사에서 땅을 차지한 사람들은 모두 싸워 이긴 사람들입니다. 경쟁에서 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땅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유한 자로 살 때 땅을 차지하는 이삭의 모습이 창세기 26장에서 소개됩니다.

 

가뭄이 생겨 이삭은 남방으로 옮겨가다가 그랄이라는 블레셋 지역에 머물게 됩니다(1). 그곳에서 이삭은 농사를 지어 100배의 결실을 얻고 (12) 마침내 거부가 됩니다(13).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마음으로 먼저 질투합니다(14). 그리고 난 뒤 이삭이 가지고 있는 우물을 메꾸어 버리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15). 게다가 그곳을 떠나라고 말합니다(16). 이삭의 반응은 바보처럼 그냥 그곳을 떠나 갑니다(17).

 

이삭은 충분히 그들과 한판 붙어볼 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길러낸 318( 14:14) 이상의 종들을 거느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말하는  16절을 보면 너는 우리보다 훨씬 강해졌다말에 이삭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뒤로 물러 서지 않습니다. 한판 붙어도 승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17절에 보면 그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더 살기 어려운 그랄 골짜기로 옮겨 살게 됩니다. 골짜기는 살기 불편하고 농사를 지어도 수확량이 줄어드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이삭은 물러 납니다. 이삭은 다시 그곳에서 우물을 확보합니다(18). 그러자 그랄 사람들은 그 우물을 빼앗아 버립니다(20). 그러자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팝니다(21). 또 싸움이 있고 이삭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른 우물을 팝니다(22). 이삭은 그곳을 르호봇이라 이름합니다. “여호와께서 넓은 곳을 주셨으니 우리는 이 땅에서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온유한 자로 살 때 마침내 땅을 차지하는 이삭입니다. 성도는 싸우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이삭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의 성공된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있은 후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이삭과 동맹을 맺기를 원합니다(28). 이것이 온유한 자의 복 받는 모습입니다. 이삭은 음식을 준비하여 그들과 먹고 마시며 잔치를 한 후 언약을 맺고 헤어집니다(30). 온유한 자는 땅을 얻습니다. 결국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이 땅에서 함께 공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가 누리는 이 땅에서의 복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냐하면 온유한 자로 칭찬받은 모세는 땅을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0:11에서 모세가 물이 없어 몹시 원망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이나 내려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12절에서 왜 두 사람의 행동이 잘못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은 약속한 땅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 이후 바로 아론이 죽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20:22). 그리고 모세 역시 산에 혼자 올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신 34: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3:25).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3:27). 단 한번의 실수로 모세는 가나안을 밟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은 틀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비록 모압에서 죽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비록 자신의 발이 닿지는 않았지만 믿음으로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사건이 바로 마 17:3절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함께 주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약과 신약의 두 장면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 37장에서 온유한 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9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1그러나 온유한 자들은<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29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라.”  온유한 자는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입니다. 그가 바로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즉 온유한 자는 믿음으로 주실 땅을 바라보는 자이며 그는 결국 그 땅에 들어가 평안을 누리는 의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주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나중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모세를 바라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실제 들어가지 못한 것은 지상에 있는 가나안은 죽음 이후에 갈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어디에서든지 죽어도 상관 없습니다. 가나안에 발을 밟지 못했다고 죽음 이후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중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믿음을 소유한 자를 의인이라 칭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의인이 누리는 최종적인 복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온유한 자가 유업으로 받는 땅은 결국 하나님 나라 천국까지를 소개합니다. 모두가 온유한 자가 되어 이 땅에서의 복과 죽음 너머의 천국을 소유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