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8):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분이십니다  

5:1-3, 18:35-43


 

오늘 본문은 공생애가 시작되고 주님을 따르고 나아오는 무리들을 향해(1) 가르치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2).


먼저, 주님의 가르침은 너무나 새롭고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3절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혁명에 가까운 소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부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리는 복은 율법을 잘 지킨 결과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로 저주를 받은 자로서 많은 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늘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부자와 가난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부자는 매일 맛있는 음식과 잔치로 날들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가장 비싼 옷을 입고(19) 화려한 삶을 매일 영위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을 주워먹는 거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이 죽고 난 뒤 결과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의 불꽃 가운데 고통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부자들은 자신들이 죽고 난 뒤 얻게 될 결과를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또 가난한 사람 역시 죽음 이후에 누리는 복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정말로 그런 사람들인가 하며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2 천 년이 지난 우리도 놀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가난하면 천국 가고 부자는 지옥 가는 결론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과연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써 내려 간 것일까요? 그리고 가르치는 분이 주님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상대가 너무 무식하기에 쉽게만 그렇게 가르쳤을까요? 주님께 나오는 자들이 바닷가 어부출신들이고 못 배운 무리들이기에 그렇게 말했을까요? 복잡하게 누구 하나 따지지 않았기에 그냥 생각 없이 가르쳤을까요? 답부터 말한다면 아닙니다.

 

마태는 무조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는 정말 새로운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누가는 6:20절에서 심령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지만 당시 듣는 사람들에게는 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마태보다 뒤에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당시 믿음의 공동체는 심령이 가난한 것임을 말한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이 부분의 번역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번역합니다. 공동번역과 현대인과 쉬운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로 번역합니다. 그리고 새번역은 마음이 깨끗한 자등으로 번역합니다. 영어번역인 NIV, KJV 그리고 NASB 모두는 spirit()으로 번역합니다. ‘심령에 해당되는 원어는 전혀 의미가 다른 프뉴마라는 단어를(‘프뉴마티’) 사용합니다.

 

프뉴마라는 단어는 마음으로 번역하기보다는 오히려 으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8절에서 마음이 가난한자라고 할 때 마음에 해당되는 카르디아라는 그릭 단어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보다는 오히려 으로 번역하는 좋습니다. 다시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를 원어적으로 직역하면 영적으로 가난 한자’ (복수)로 번역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필 차례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가난이라는 단어는 가난한(poor), 가난한 사람(poor man), 그리고 거지(beggar) 등으로 번역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볼 때 우선 그는 영적 거지입니다. 그리고 그는 영적으로 구걸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를 가장 잘 번역하면 영적으로 갈급함이 있는 자로 번역하면 적합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 가난을 언급할 때 두 가지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들이 뭔가 살아가면서 사용할 것은 있지만 여분의 것이 없는 가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페네스). 그러나 한편으로, 가진 것이라고는 아예 없는 매우 극빈한 가난이 있습니다(프토코스). 당연히 3절에서 사용된 가난은 후자입니다.

 

그래서 먹을 양식이 전혀 없어 살기 위해 구걸하는 거지처럼,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영이 사는데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 영의 양식을 가진 자에게 무조건 애걸하는 상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갈급함이 있는 자라는 말은 물질이 많고 적은 부자와 거지라는 그런 개념이 전혀 아님을 알려 줍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영적으로 갈급함이 있는 자들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결론입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자는 돈이 많으면 지옥 가고,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 간다는 논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성경적 가르침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돈을 다 가진 부자이던 정말 돈 일전 갖지 못한 가난한 자일지라도 영적 갈급함이 있어야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조건을 명확히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영적으로 갈급하다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물질을 더 갖기 위한 욕망이 있습니다. 한편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영이신 하나님을 찾는 목마름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을 가진 존재이기에 영과 관련된 죄와 죽음의 문제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와 법은 죄와 죽음을 끊임없이 연결 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범한 사람은 죽음으로 처벌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해도 영에 관한 것을 인간의 혼(지혜)이 찾지 못하기에 영이 괴로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착하게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죄를 선언 못합니다. 이 유죄 때문에 모두가 죄에 대해 고민합니다. 이것이 양심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갈급함은 인간의 악함과 죄로 짓눌린 자신을 발견하고 도저히 스스로 구원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부르짖는 몸부림입니다.

 

예를 들면, 삶에서 일어나는 반복되는 죄에 대해 내 영혼이 슬퍼하고 그 문제의 해결 책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반복되는 죄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무너지는 나를 바라보며 좌절하며 한숨 쉬는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만 간청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눅 18: 13의 세리의 기도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자신은 민족을 팔아먹고 하나님을 속이며 자기 백성들에게 세금을 세배 네 배 받는 세리입니다. 그의 영 속에는 로마라는 구조 속에 묶여 어쩔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만을 간구합니다. 자신에게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한계상황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한계를 주님 앞에 털어놓는 외침(한탄)뿐 입니다. 해답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인정하며 메달리는 몸부림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들 가운데 유대인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가장 먼저 주는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으로 완성할 수 없는 구원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해결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한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울부짖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저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고민하게 됩니다. 답을 찾지 못해 몸부림칩니다. 구원을 너무나 간절히 추구하지만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창기와 세리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은혜만을 구걸하게 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에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인생의 낭떠러지에서 구원이라는 마지막 소원을 붙잡고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으로 갈급한 자들임을 주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 세상에서 육신의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데 어떻게 영적으로 갈급한 자로 변할 수 있을까요? 18:35-42절은 그 비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언제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구걸하는 한 맹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가족과 자식들, 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육신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동네를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38).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야단침에도 불구하고 더욱 크게 소리칩니다. 그는 비록 육신적인 문제로 주님을 찾기로 합니다. 믿음은 없지만 그냥 소문을 듣고 나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병자들을 다 치유하지 않았습니다. 치유를 원해서 나아오는 자들만 고친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병 낫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의외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육신적 갈급함을 영적 갈급함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아픔, 상처, 질병, 이별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수 많은 인생의 문제를 갖고 주님을 찾아 갑니다. 절대로 틀린것이 아닙니다. 그런것을 가지고 가면 영적이지 않기에 주님은 외면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고통가운데 있는 한 영혼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나아오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께로 오기만 하면 주님은 시간을 두고 그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성경공부, 성도의 교제). 네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정말 나를 하나님으로 보느냐?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구원자로 믿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그 사람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이 생겨납니다. 세상 어떤 것도 고칠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을 오직 하나님 만이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더 이상 그것들은 육신의 목마름이 아닌 영적 갈급함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고민을 가진 사람이 믿음으로 주님게 나아갈 때 영적 갈금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질병만 고치지 않고 맹인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이유입니다.   

 

 

천국은 이제 그런 사람들의 소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영적 갈금함을 가진 사람들 만을 위해 준비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열려지고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계 21:4절에 의하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고 말씀합니다. 우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셔서 기쁨으로 바뀌게 하십니다. 다시 죽는 사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별과 상처로 곡하는 슬픔이 사라져 버립니다.

 

영적 갈금함을 가진 자가 되어 이 땅에서의 복과 구원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