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신앙(7): 낙심vs 소망   

42: 1-6

 


우리 성도님들에게는 언제 불안이 찾아오는지요? 앞날이 불확실하고, 능력은 부족하고, 상황은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을 때입니다. 불안이 지속되면 붙잡고 있던 감정이 무너지면서 한 층 더 깊은 낙심으로 떨어집니다. 3절에서 시편 기자는 낙심된 자신의 처지 앞에서 계속 흘러 나오는 눈물뿐이라고 호소합니다.

 

7절에서는 아무런 소망마저 없는 상태를 끊임없이 밀려드는 바다의 파도와 폭포의 거센 물결이 모든 것을 휩쓸고 간 것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죽을 것 같은 슬픔과 좌절 가운데서 자신이 낙망하고 불안해하는 이유를 찾아냅니다. 사람들은 당장 돈이 없으면 걱정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낙담합니다.

 

그런데 시인 자신을 불안케 만들고 낙담시키는 진짜 문제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못한데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5절에서 낙심과 불안 가운데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해, ‘왜 너는 낙심만 하고 있어! 왜 불안에 떨고 있니! 이제 하나님을 바라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입술에 찬양을 올려 드려라고 소리칩니다.

 

어린 아이들은 전쟁터에서도 엄마만 있으면 잘 놀고 평안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곳에 있어도 엄마가 없으면 울기 시작합니다. 우리 역시 불안하고 소망을 잃는 근원적인 문제는 예수께 바짝 밀착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소망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예수님께 딱 붙어 사는 법을 2절에 집중해서 찾아 보려고 합니다.   

 

첫째,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주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갈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시인은 성일에 무리와 함께 성전으로 가며 감사와 가쁨의 찬양을 부르며 즐거워했던 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먼저 예수로 인해 나의 영혼이 행복했던 과거의 특별한 기쁨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다른 기억은 6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행복을 주시고 선한 은혜를 베푸시던 하나님 그분 자체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을 회상하는 이유는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소망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면 그곳을 찾는 것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갈망으로 인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겠지요

 

둘째, 어떤 방해물이 앞에 있을지라도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막아서는 것은 3가지입니다. 상황과 처지와 형편입니다. 상황: ‘비가 오고 길이 막히는 상황이다할 때 내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진 사건이나 분위기입니다. 처지: ‘우산이 없어 비를 맞아야 하는 내 처지라고 말합니다. 주어진 사건에 어떤 당사자로 서 있는가 하는 개인의 입장입니다.

 

형편: 비가 와 택시를 타려는데 경제적 형편이 안 됩니다. 즉 개인의 실질적인 조건을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을 얽매는 것들을 뒤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나아가는 이유는 조롱(3), 눈물(3), 마음의 상함(4)을 이겨내게 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은 죽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귀 기울여 내 형편을 들어주십니다. 주님의 눈은 내 눈에서 나오는 피 눈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로 불안하고 낙망한 나를 크신 팔로 품에 꼭 안아 주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얼굴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죽어가는 내 가정을 살리고,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 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은 2(42-72)의 첫 장입니다. 1권과 차이점은 어떤 하나님의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하느냐입니다. 2권은 여호와’(1: 272/15) 보다 엘로힘’(2: 164/30)을 많이 사용합니다.    

 

죽을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하듯이 절박합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신명인 엘로힘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요? 정리가 좀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러 왔다가 얼굴도 못보고 간다라고 합니다. 두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하나님과 만남은 기도로, 찬양으로, 성경 읽기로, 묵상으로, 친교로, 구제와 봉사로 또 다른 방법으로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든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얼굴을 보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본론만 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가서 예배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을 체험하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내 죄를 깨닫고 회개가 일어나고 바르게 서기로 결단이 생기는 주님의 임재를 매주마다 경험합니다. 게다가 예배는 한쪽이 무시되거나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드림(헌신 감사 찬양 기도 물질 결단)이 있고 받음(말씀 은혜 용서 회복 치유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내 삶이 반드시 변합니다. 이것을 인격적 교제라 부릅니다.

  

세상은 불안과 낙담을 주지만 하나님은 소망을 주십니다. 이 소망을 가지기를 원하면 주 안에서 누린 최고의 기쁨과 그 기쁨을 준 하나님을 기억하며 찾기를 갈망하십시오. 나를 막는 모든 장애물을 뒤로하고 만남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인격적 교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