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 있는 믿음(2):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
2:1-9
세상을 보면 피부 색, 가진 것, 배운 것들이 다양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다름이 사람을 차별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안타깝게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도 차별이 있었습니다. 2절에 회당이 언급된 이유는 그때 당시 성도들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회당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회당 안으로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을 때 뭔가 차별이 일어납니다. 3절에
의하면,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좋은 자리에 않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들의 발 아래 앉으라고 합니다. 말하는 것도 ‘앉으소서’와 ‘앉으라’고 차별합니다.
물론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두
사람을 차별해서 대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4절에 의하면, 야고보는 이런 모습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혹시
회당을 위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잘 대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높은 사람이어서 알아두면
나중이라도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유익을 줄지 생각하고 친절하게 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물질을 꾸러 온 사람이기에 도와주어야 합니다. 구제 대상이고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손해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차별하는 모습은 6절에서 구체적입니다. ‘못 배웠다고 업신여깁니다. 부자들은 돈을 빌려주어 빚지게 만들고
때로는 법정으로 끌고가 종으로 삼고 억압합니다. 게다가 ‘예수
믿고 부자는 못될 망정 무슨 거지 꼴이냐?’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은 ‘크리스천’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조롱하는 모습도 7절에서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에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죄의
사슬에 묶여 사망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흙 수저인지 금 수저인지 신분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아버지의 자녀로 다시 삼기로 원하셨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차별 없이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주님의 온통 관심은 외모나 물질
재능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그래서 5절처럼
하나님은 믿음으로 부요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도록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도 택하시고 주의 백성으로
불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당연히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준 것이 맞기에 성도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서 나타낼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물질을 가지지
못하거나,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차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소외 당하고 차별 받던 창녀와 세리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병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역시 죄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를 동일하게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죄로 인해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성령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때 점점 그 모습이 제대로 작동됩니다. 8절을 보면, 차별 없이 이웃을 도와주는 ‘최고의 법을 지키는 행함 있는 사랑의
사람’이 점점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외적인 것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차별합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우리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서 보여 준 것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차별 없이 대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남은 시간에는 물질적으로만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주위에는 여전히 물질적으로 가난한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돕고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또 따른 차원의 가난한 분들이 있고 그들에
대한 차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평강을 소유치 못하고,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는 생수가 없어 목 말라 하는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공허함으로 일에만 빠져 있습니다. 소명 없는 현실을 이기지 못해 마약으로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외면치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안
주는데 무슨 차별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관심 없는 무관심은 차별보다 더 심합니다. 차별은 그나마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무관심은 살든 죽든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9절에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죄’라고 경고합니다. 차별도 죄인데 더 근원적인 무관심은 더 큰 죄라는
것을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는 물질이 부족한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지갑을 열어 있는 것을 나누어 우리와의 차이를 없애야 합니다. 더 나아가 소망과 평강이 없어, 영혼의 갈급함 속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면 복음으로 빈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한 예수가 보인 차별 없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