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제직(1): 나눔의 자세
약 1:1-2, 27
지난 주에 이어 ‘나눔’에 대해 야고보서를 통해 성도님들과 함께 몇 주 더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 나눔을 실천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러면 이 편지가 쓰인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보아야 하겠지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 서신을 기록한 때는 주후 45-62년 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약1:2절 보다 더 상세히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구절은 행 11:28절입니다. 아가보라는 선지자의 예언과 그 결과를 적어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천하’에(NIV: the
entire Roman world) 큰 흉년이 있을 것이고, 실제로 글라우디오 때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PPT의 년도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황제 글라우디오스는
주후 41-54년까지 통치합니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제국 곳곳에 기근이 심했다고 합니다.
아가보 예언은 실제 글라우디오
통치 4년인 주후 45년경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대기근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 땅에는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엄청났습니다. 극심한 기근으로 생존마저 위협당하던 때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과
룻기를 통해 남들이 사는 땅으로 이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삶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아내를 빼앗길 뻔합니다. 룻기에서는 나오미 가족은 모압으로 먹을 것을 찾아 이주하게 됩니다. 행11:19절을 보면, 야고보가
살았던 이 시대 사람들 역시 유대교의 핍박으로 유다를 떠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약 1:1절에서 야고보는 이들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고 부릅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 시기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기에는 매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1:27절을 보기 바랍니다. 야고보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여유 있는 삶을 살 때 나누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처한 상황에서 내 것을
나누는 것은 목숨과도 바꾸는 그런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내 가족이 굶어야 남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절대빈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야고보서를 읽어서는 안됩니다. 당시
성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힘든 가운데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 성도는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와 상황은 다를지라도, 성도라면 누구나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우며 살기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내 속에서 없애야 합니다. 먹고
사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느껴질 때, 내 속에서 자신만을 생각하고 보호하는 마음입니다. 남보다는 내가, 내 가족이, 내
공동체가 우선이라는 이기적인 보호본능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있으면 주위에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든 고난의 삶은 가장 먼저 마음을 메마르게 합니다. 본문에서 보는 흩어진 성도들은 이방 땅에서 투자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땅 하나 없이 남의 나라에 가서 사는 유랑민 신세입니다. 그럼에도 나누는 이들의 진정한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들도 힘들고 어려웠지만 가난한 이웃을 도왔던 우리
선배 성도들의 비결을 하나 더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약1:27절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즉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가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돌볼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정결하고
더러움 없는 경건’이라 야고보는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자신들을 지키는 것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한 삶’이라 믿었습니다. 또한 세상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경건’이라 믿고 그것을 목숨 걸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나눔은 자신들이 먹고 남아서 배부른 상태에서 내 것 떼어 주는 여유로운 실천이 아닙니다. 이것을 세상은 ‘자선’이라 부릅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과 다르고, 또 달라야 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생존이라는 극심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강한 마음들이 있는 처지에서도, 나보다 더 연약한 이웃을 바라보고 보살폈습니다. 이 나눔을 배워야 합니다.
꼭 물질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가서 시간을 함께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훈련을 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늦게 와서 그 날을 보지
못할지라도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부에 처하든 가난에 처하든 늘 나누는 삶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나눔이 믿음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이 원하는 정결한 삶이며,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나누는 삶은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남아서 도와주는 ‘자선’이 아닙니다. 내
것이 없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는 순간에도, 성도는 내가 가진 것을 보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나 보다 더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내 것을 떼어 줄 수 있고, 내 입에 갈 것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당시 성도들은 세상과 구별되는 나눔의 삶을 실제로 선택했고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나눔은 세상의 나눔과 전혀 다릅니다. 내 기분과 감정, 내 삶의 조건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나눔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말해 줍니다. 힘든 상황에도 나눔이 있는 그 사람이 예수를 제대로 따라가는 성도입니다. 나눔은 믿음생활을 자랑하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 닮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는 분들과 앞으로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는 성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