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앙생활(9): 주를 시인하는 신앙 
                                               고전 12:1-3

 


사순절을 지내면서 참 많은 은혜가 있음을 매년 고백합니다. 모든 일에 주님의 놀라운 도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들이 잘 된 분들은 동의하지만, 잘 안되고 있는 분들은 동의를 구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늘 좋은 것을 주셨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종종 어떤 분들이 당신 교회는 은혜가 있느냐?’ 고 저에게 묻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기준 삼아 은혜가 있다 없다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 세례자가 꾸준히 나오는 영혼구원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을 접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게 된 계기와 이유와 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돈 복 터지는 사람 되려고 예수 붙잡았습니까? 안 되는 출세길 뚫어 보려고 선택하셨습니까? 우리들 가운데는 그런 분이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한번도 못 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내 이성이 받아들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났다고 고백까지 할 수 있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너무 기이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은혜를 만나고 예수를 인정하는 일이 일어나는지를 좀 더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1절 말씀처럼 신령한 것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산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고, 귀신 이야기처럼 오싹하는 느낌이나 뭔가 특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령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만으로도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열심히 다녔는데 전혀 안 믿어진다면, 사실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 만나 사귀고 같은 취미 가진 사람끼리 모여 좋은 구되는데 만족하면 신령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거부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의지는 없습니다.

 

만약 부처를 믿어 절에 다녀 수행을 했다면 어떨까요? 엄청난 칭찬받는 보살소리 들을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와서 시간 낭비만 한 것입니까? 아직 한가지 더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까지 은혜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기엔 너무 이른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 양편에 있던 강도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의 은혜는 포기가 없습니다. 수 없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여러분이 이사 다닐 때 얼마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을 접하게 했습니까?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기적 같은 일들은 또 얼마나 일어나게 도와 주었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은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도 몇 번의 은혜를 주었냐고 따지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충분한 영상 자료까지 철저히 기록으로 남겨 두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20:12) 의하면 행위를 기록한 책으로 소개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것에도 지적 당할 그런 분이 아닌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날마다 더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점점 우상에 멀어지게 되면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다 보면 돈이 주는 파워를 느낍니다. 권력이 주는 힘으로 거의 다할 것 같습니다. 누리는 명예로 높아질 때까지 높아지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정도되면 하나님 말씀이 그 사람의 가치 기준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즉각 반응해 주고 자신을 위해서만 복을 허락하는 우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하라고 한다고 그대로 해 주십니까? 내가 소원하는 것 제 시간에 딜리버리 해 주십니까? 매번 늦고 소포 열어보면 원하지 않는 것만 잔뜩 보내옵니다. 우상이 되기에 매력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진실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나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가장 타이밍을 잘 맞추십니다. 이 경험을 하기 시작하면 우상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상은 허상인 것 이미 알고 있지만 더 좋은 가치 있는 분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온 성도님들은 이제부터 길과 진리이고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시간이 그분들에게 허락되기를 위해 더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저주하는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내가 예수 안 믿고 살아가면서 예수를 저주까지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지요? 누구한테 싫은 소리 안 하는 사람인데 설마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그것도 2천년 전 유대 사람을 욕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직접 죽은 자들을 살리는 기적을 세 번이나 목격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여 버립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심지어 복음을 들어 알고는 있지만, 고백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영원한 생명을 저주했습니다. 진리를 저주했습니다. 구원의 길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더 믿게 되었고, 다른 신을 붙잡았고, 우상에게 절했던 것입니다. 이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은 3절 말씀처럼 성령뿐입니다. 나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이 오셔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살면서 지금까지는 죄가 아니었던 것들이 죄로 느껴지고 부담스럽습니다. 전혀 죄인으로 살지 않던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죄 값으로 영원한 사망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가 이 문제의 해결자라는 복음의 소망을 품게 될 때, 은혜는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시인하는 과정은 설명이 필요하기보다는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신비함을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도장처럼 찍히며 확실히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라는 믿음은 내 의지가 아닌 성령이 말하게 하신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 멋진 고백을 품은 오늘 세례자들과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