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주일: 날마다 죽는 삶
고전 15:30-31
오늘은 봄학기 개강 주일로 드려집니다. 방학
동안 쉼과 회복이 있었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이 이타카로 돌아와서 아직은 조금 남은 추운 시간을 함께
더 따듯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아 다들 새로운 각오로 나아가고 계실텐데요. 우리 모두가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에 어떤 것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어 조금은 걱정도 있습니다.
2천년 전의 바울 사도 역시 복음사역을 감당하면서 비슷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지난 해 저는 튀르키예를 다녀왔습니다. 한반도의 3.5배라는 엄청난 크기도 압도적이었지만, 일정 가운데 정말 높고
험한 산길을 차로 타고 넘어가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길을 발로 걸어서 다녔을
텐데 정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강과 바다를 건너고, 길에서
도적들을 만나는 험한 여정이 거의 매일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들이 한 해
동안 걸어가야 할 길 역시 탄탄대로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험한 시간들을 이겨냈던 바울 사도는 어떤 승리의 비결을 들려 주고 있는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고전 15:30절을 보면 ‘위험을 무릅쓰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무모하게 고난을 자초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살다 보면 피할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아프기도 하고, 사고도 나고, 직장을 떠나야 하기도 하고, 예상 못한 재난 재해도 일어나기도 합니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부모이든 자녀들이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의 고난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배척과 외면, 메질과 심지어 돌을 맞는 위험 등의 고난과 환란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닥치는 이런 위험들을 피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성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와 성령의 인도함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경험이 효력을 발휘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조차 응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에는 어리석게 달려 들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뛰어남을 보이려고 영웅처럼 행동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이유로 과감히 행동하게
됩니다. 부활신앙입니다. 성도는 만용과 객기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는 부활신앙으로
험한 환경을 이겨 내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부활신앙으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때가(3가지) 있습니다. 1) 히 11: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기 위해 시험(test)하는 경우입니다. 예가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 11:19절을 보면, 놀랍게도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부활 신앙 때문이라
말합니다. 자신이 아들을 죽일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살릴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정말 생뚱맞게 죽을 것 같이 힘든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이때 성도는 부활신앙으로 하나님이 복 주려고 요구하는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생명이든 물질이든 명예이든 높은 자리이든 주가 요구할 때 드릴 수 있는 용기가
부활의 믿음에서 나오기를 원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어 다음 세상에서 만날 자식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죽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살릴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믿음입니다. 결국 부활 믿음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남들한테 내 것을 빼앗길 때도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만듭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받은 엄청난 복을 창 22:17절은 말합니다. 승리한 우리에게도 분명 눈에 보이는 것들이
복으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큰 복은 바로 창12:12절의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각자 믿음을 인정 받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2) 하나님 영광을 위해 성도의 생명까지 원하는 때입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속으로 던져질 위협을 당합니다. 단 3:17절을 보면,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당장 건져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단 3:18절에는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 절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당장 하나님이 구해주지
않는다면 포기할 수 있을텐데 굳이 이들이 불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이는 먼 훗날 살아날 것을 믿었던
부활의 신앙 때문입니다. 단 12:2절을 보면,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라’는(표준새번역) 부활소망을 분명히 소개합니다.
다니엘의 부활신앙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죽음 이후에 다시
살려 준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더 확실히 단12:13절을
보면, “너는 죽겠지만, 끝날에는 네가 일어나서 네게 돌아올
보상을 받을 것이다”(표준새번역 vs개역개정 비교 PPT)라고 미래의 부활을 약속합니다.
3)
마지막 경우를 바울 사도에게서 살펴 보려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여기서는 죽음 이후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앞선 두 사람 아브라함과 다니엘과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죽을 것 같은 현실의 고난에 부활신앙을
적용시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현장에서 그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 다릅니다.
고전 15:31절을 보면, 바울 사도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일 매일 죽음의 공포에 자신이 노출 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부활소망입니다. 죽어야
살 수 있듯이 죽음과 같은 현실 앞에 날마다 죽어야 부활의 능력이 매 순간 나에게 역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 것 손해 보며 산다는 뜻입니다. 안일과 편안보다 희생을 택합니다. 정말 하기 싫지만 남들에게 내
자존심 내려 놓습니다. 받기보다 베풀기를 더 좋아합니다.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에서 매일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죽기보다 싫은 것들 아닙니까?
십자가 앞에서 나의 자아를 죽이는 것이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죽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허락하는 부활의 능력만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걱정과 염려,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능력은 내가 죽는 것과 같은 고난을 통해서만 풍성히 받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죽어 다시 사는 승리의 삶을 매일 체험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