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16): 나를 치는 자들을 굴복시킵니다 

18: 1, 3, 9, 16-17, 39

 


한 해를 돌아보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늘 이때 다사다난했습니다또는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 말들 가운데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참 많았고, 내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4, 5절을 보면, 다윗 역시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 등 무려4개나 되는 다른 표현을 사용해 험한 인생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일들이 사방에서 터지는 모습들입니다. 거짓과 비방과 음모로 덫을 놓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을 묘사해 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왜 이런 환란이 다윗에게 일어났는가를 질문합니다. 20절을 보면 다윗 자신의 손으로 죄를 짓지 않았고, 21-22절은 하나님의 말씀(도 규례 율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23절에서 심지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았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결국 이 시편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성도가 당하는 핍박은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뜻 이루고 사는 성도를 세상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딤후 3:12절에 따르면,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의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에 의해 드러나듯이, 경건은 항상 죄를 드러내기에 세상으로부터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살다 실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성도도 사람인지라 정말 답답한 것도 사실입니다.  

 

20-30년 전에 한인들이 집중되어 있는 LA, 뉴욕과 뉴저지는 새벽이면 정말 눈에 뛰는 모습이 하나 있었습니다. 새벽기도에 가려는 성도들을 픽업하는 교회 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나이드신 한 분이 새벽 기도회를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뉴스를 접하고 마음 아파했던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입에는 새벽기도 안 갔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하는 소리도 나올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하는 분들의 기도가 쌓여 교회가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앞으로 더한 일도 생길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는 억울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나누려 합니다.

 

먼저,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통화가 가능하기에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모든 것이 차단되어 대화마저 안 된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나 6절을 보면, 하나님은 답답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내 목소리를 늘 들어주는 하늘의 귀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음까지 다 듣습니다. 답답함이 있으십니까?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아 그 분 앞에 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르짖는 성도가 되어 구하고 찾는 것들을 얻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다 핍박도 당하지만 억울해 하지 않는 이유는, 직접 내 문제에 개입하셔서 풀어주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정말 여러 방식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를 구원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십니다. 나의 반석이요, 요새시며, 환난에서 건지시는 이가 되시고, 피할 바위가 되고, 방패와 구원의 뿔이 되며, 적으로부터 지키는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3절처럼 하나님은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들이 누구입니까? 우리를 실제로 괴롭히는 사람(39: 나를 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들과 억울함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권능의 손을 펴사 떨고 두려워하는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죽을 것 같은 큰 물 앞에 선 나를 기적같이 건져내십니다.

 

17절에서는 나보다 힘이 센 하나님이 직접 내 사건에 개입해서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입을 막아주고 비난으로부터 건져 주십니다. 성도가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억울해 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 해야 합니다. 사건에 직접 개입하셔서 의인을 건져주는 하나님의 공의가 여전히 지금도 세상에서 작동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고 삶에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하나님이 지금 당장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불의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미루어지는 느낌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셋째로 종말론적 신앙이 성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9절과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 땅에 장엄하게 등장하십니다. 죄와 불의한 사람들에 대한 진노로 말미암아 모든 우주가 흔들립니다. 결국 악이 무너지고 선이 승리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지금이 아닌 마지막 날 .재앙과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서 억울하게 눈물 흘리며 살지라도 하나님이 먼 훗날에는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내 손을 들어 주실 것이고 눈물 나게 만들었던 이 땅의 모든 불의를 제거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지금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성도들이 억울함을 이겨낼 수 있는 막강한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억울함 당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과 거짓 증인들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조롱 받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은 오늘 날 우리들의 삶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둠의 세력에 붙잡힌 세상으로 핍박이나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39절을 보면, 하나님은 능력으로 우리들을 띠 띠우셔서 모든 고통과 수모를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하십니다. 이 믿음 붙잡고 나아가면 힘든 일은 다 지나가고 어느 날 평탄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올 한해 어려움을 참고 이긴 성도들 앞에 복된 새해가 열릴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