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13): 모든 것을 참습니다

고전 13:4-7

 


사랑의 속성 15가지를 나누어 오고 있습니다. 전부 다 기억 못하지만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참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두 곳에서 사용하는 참는다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고전 13: 4절에서 오래 참는다고 할 때는 내가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누군가가 화나게 만드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해를 당하고 있을 때 보복할 힘이 있음에도 자제하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절대로 죽이지 않겠다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언급된 참는다는 조금 다릅니다. 타인의 허물과 부족함을 볼 때 그 사람을 보호 한다 연약함을 덮어준다다른 두 가지 뜻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protect’,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덮어준다로 번역 합니다. 반면 개역개정과 현대인의 성경과 KJV, NASB(bear)는 그대로 참는다로 번역합니다.

 

홍수 심판 후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짓게 됩니다.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벗은 몸이 됩니다. 이 모습을 본 아들 함은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메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실패와 수치와 허물, 약점까지 덮어주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까지도 용서하시고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죄로 인해 그들의 수치가 드러나자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었습니다. 숨어 있는 그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은 죄에 대해 명확히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간의 죄와 허물까지도 용서하여 주시겠다는 구원의 약속을 행동으로 보인 것입니다. 죄는 심판하지만 연약함으로 죄 짓는 인간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시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가 이웃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덮어 주어야 온전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상처가 생기면 약을 바르고 싸메 줍니다. 상처부위를 잘 덮어 주지 않으면 감염이 되어 더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단점과 약점과 아픈 부분을 파헤치고 비난하면 상처는 깊어지고 감정의 골은 더 깊어만 갑니다.  

 

듣는 것 같지만, 비난하는 상대 역시 언젠가는 실수가 드러나기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허물이 레이더에 잡히면 비난하기 시작하고 악순환만 일어날 뿐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소모전이고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까? 이쯤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누가 그 사람을 고쳐주며, 지금까지 참았는데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 허물을 말해 주어야 고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질문해 보기 바랍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또 성도간에 정말 많이 참으셨습니까? 나만 참는 것이 아니라 남도 나를 참아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의 잘못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 지적하고 고치려는 행위는 정말로 신중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10:5-7, 12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벌하는 수단으로 앗수르를 징계의 막대기로 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심판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허용한 막대기를 넘어 더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를 꺾어 버리고 그들의 죄악과 함께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면 주님은 치유하십니다.” 내가 판단하고 그들을 고치려는 순간 주님이 할 일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정죄하는 것을 멈추고 물러나 주님께 온전한 심판을 맡겨 드리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12번에 걸쳐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사랑과 인간이 하는 사랑의 차이가 느껴지시는지요? 차이점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대로 우리도 이웃을 그대로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라고 하면서 세상 방식대로 한다면 나중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어느 마을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정말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집안 일을 잘 돌봅니다. 그런데 막내 아들은 너무 버릇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돈을 다 챙겨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며 소진해 버립니다. 결국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이 모습을 본 형은 동생이 어떤 짓을 하고 다녔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허물을 너무 잘 알고 들추어 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허물 많은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연약한 동생을 걱정하며 매일 문 앞에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모두가 축하합니다. 그런데 큰 아들만 예외입니다. 아버지가 벌이는 잔치에 소외자로 남게 됩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합니다. 아버지께 동생의 허물을 들추어 내어 말하려고만 합니다. 죄와 허물과 단점을 가진 동생을 향한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 걱정하고 염려하는 같은 마음을 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혼나는 사람은 동생이 아니라 형으로 보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세상이 사랑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우리도 여전히 믿음의 공동체에서 성도가 함께 누려야만 하는 사랑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방식대로 사람들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이 오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단점을 들추어 내고 비난하지 않습니다탕자의 아버지처럼 아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걱정해 주십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는 사람을 사랑하되 내 마음에 드는 것만 보고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수치까지도 덮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