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8): 데마
골 4:14
오늘도 골로새서에서 언급되는 한 성도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인물들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모두들 하나님께 충성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로 소개되고 칭찬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은 아쉬움이 남는 인물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모두
3번 정도 나오는 데마입니다.
딤후 4:10절의 ‘그가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말에서 그의 출신지를 데살로니가로 추정을 합니다. (PPT1 참조). 바울 사도는 2차 전도 여행에서 마케도냐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데마는 바울을 만나고 그 이후 바울 사도의 전도 여행에 함께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울 사도는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모두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체포 되어 로마로 이송됩니다. 골 4:10절과 몬 1:23절을 보면, 로마 감옥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기록 하게 되는데요. 각각
이어지는 골 4:14절과 몬 1: 24절을 보면, 데마는 바울과 함께 하고 있음을 또한 보여줍니다.
게다가 바울은 데마를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고
불러 줍니다. 그때까지 데마는 바울에게 사랑 받고,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긴 했지만, 행 28:23, 30절을 보면,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바울에게 변화가 오고 2차로 감옥에 수감 됩니다. 이때
생애 마지막 바울 서신인 디모데후서가 기록됩니다. 딤후 4: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라는
바울의 쓸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딤후 4:9, 11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오면서, 마가도 데려 오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딤후 4:10절에서 소개됩니다. 지금까지
바울과 늘 같이했던 데마가 그의 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노 사도의 인간적인 섭섭함과 외로움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떠남으로 인해 복음사역이 멈추지 않고, 그의
뒤를 이어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도록 디모데와 마가를 급하게 부른 것입니다.
한편으로, 데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충격과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바울과 여태까지 동고동락을 했던 그가, 왜 그 시점에서 떠나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그렇게 죽도록 주님
사랑하며 섬겼는데도, 어느 순간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지처럼 여기던 사람도 내 팽개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힘 입니다. 죽음을 앞둔 바울 사도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울 사도에게 환경의 변화가 생깁니다. 로마 시내에 대규모 방화가 일어났습니다. 내로 황제는 로마 시민들의
불만을 크리스천들에게로 돌리며 성도들에게 박해를 가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바울의 죽음은 이런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바울 곁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느낀 데마는 바울을 떠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질문이 생깁니다. 그의 떠남은 성도의 일시적인
영적 침체인가? 아니면 한 개인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데마를 통해 참 어려운 신학적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또 데마는 잘 믿는 성도들에게 충격을
주는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믿음이 흔들려서 주님을
배반하고 구원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확실히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간단하게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을 다룰 때, 특별히 롬 8:38-39절에서 확실히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시 타락하지 않습니다. 다시 사탄의 자녀가 될 수 없고, 믿음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주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나’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합니다.
이것을 볼 때 그의 떠남이 배교와는 다른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가 나중에
돌아왔으리라는 믿음으로 이 본문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경험에서도 마가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데마는 나중 이교도의 사제가 되었다는, 성경이 아닌 다른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경우는 참 애매하게 만듭니다.
먼저,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전적인 영역이기에,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교회를 잘 다니다가 점점 믿음생활에서 떠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교회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이런 경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일 2:1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생활 하다가 떨어져 나가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생활은 했을지라도 처음부터 믿지 않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최종적으로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 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유혹이나 죄의 습관 때문에, 때로는 성도 역시 주를 일시적으로 떠납니다. 하지만 돌아온 탕자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매를 드시고 때려서라도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믿고 거듭난 날부터, 날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갖고,
더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은 백성들의 당연한 삶이고 자연스런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데마가 구원을 받았을까? 못
받았을까? 이것에 집중하기보다, 나는 어떤 결단을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열정적이며 책임감 있어 보이든 데마는 고난 앞에서 세상을 향해 갔습니다.
비난에 앞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에 대한 단호한 사랑의 고백이, 나에게 있는지, 또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을 것이라는 결심이, 실제 나의 교회생활의
작은 것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성도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