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14):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삼상 13:1-3, 5, 8-9, 13-14

 


오늘 말씀은 본문의 배경부터 살펴 보려고 합니다. 1절을 보면,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정도입니다. 국가의 틀을 세워 나가는 즉위 초기의 분주한 시간입니다. 2절을 보면, 사울의 국정 첫 과제는 상비군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국가들로부터 전쟁의 위협을 대비해, 군사체제를 최우선으로 정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3절을 보면, 왕위에 오르고 초창기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요나단이 주도하긴 하지만, 사울은 이스라엘 땅에 배치되어 있던 블레셋 수비대를 기습합니다.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우선, 어수선한 시기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유능한 사울의 전술일 수 있습니다.  

 

다음은, 11장에서 보았듯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한 사울의 담대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또 다른 사울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2절을 보면, 많은 백성들이 군사로 모였지만, 3천명만 뽑고 돌려보냅니다.  

 

많은 병사들을 지원하는 일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 큰 어려움은 전투현장에서 사울과 요나단 두 명만 언급됩니다. 이것은 유능한 지휘관의 수가 너무 열세라는 뜻입니다. 5절에 블레셋은 병거가3, 마병이 6, 백성은 바다의 해변의 모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겨우 3천으로 너무 적은 병사들의 수입니다.  

 

22절을 보면, 더 큰 문제는 군사로 모인 사람들의 손에 든 무기는 전부 농사짓는 도구였습니다.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과 창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전쟁에 능한 지파의 가문 출신입니다. 충분히 확전 될 것까지 고려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왕으로 즉위 후 처음으로 적을 향한 공격이라는 점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처럼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상당히 이상합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하나님께 무조건 물어야 합니다. 전쟁이 아닌 작은 기습에 불과하기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면 잘못된 길을 이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께 물은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삼상 14:3절을 보면, 전쟁터에 에봇을 입은 아히야 제사장이 사울 곁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28:28, 30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에봇 입은 제사장의 흉패 안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전달 되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은 왜 사무엘에게는 묻지 않았을까요? 사무엘이 자신의 영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잊었거나, 즉위 하면서 정치적으로 거리를 둔 것인지, 아니면 확실히 사무엘을 무시하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는 시점부터 사무엘을 찾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권력을 사울 왕에게 이양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울은 자신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기에, 기습도 계획하고 전쟁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 앞에서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임을 잊었습니다. 자신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돕고 기도하는 사무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왕이라는 높은 자리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결론은, 수비대 침공은 즉위 초에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독단적이고 인간적인 사울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블레셋이 공격하자, 사울은 삼상 7: 7, 9절에서 블레셋과의 1차전에서 사무엘이 기도와 번제를 드릴 때 승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서야 사무엘을 부릅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믿었고, 예배를 수단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8절을 보면 기다리던 사무엘이 오지 않자 백성들은 떠나기 시작합니다.

 

급한 사울의 머리 속에 누가 드리면 어떻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9절에서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사울의 행동은 잘못입니다. 13-14절을 보면, 제사장에게만 허락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왕이 망령되이 행했다말하며 폐위를 일차로 경고합니다. 사실 번제와 기도만 드린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무엘상 7장에서 있었던 첫 번째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요인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사무엘이 단지 번제와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삼상 7:9절을 다시 보면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기도와 번제가 진정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가운데 드려져야만 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예배는 단지 하나님이 인간의 바램을 충족시켜주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간데 없고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은 움직인다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사울의 생각은 철저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영적 지도자와의 거리 또한 더 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안 좋아질 때, 이것부터 고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려 주는 것입니다(벧전 3:7 부부관계: 기도가 막히지 않게).

 

5:24-25절에서, 예수님은 예배하기 전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면 먼저 해결하고 오라고 성도간의 관계에 대해 명령하십니다. 6:6 절에서, 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 즉 성도와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물질만 아니라 영적 영역에서도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합니다.

 

13:17절은, ‘여러분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따르고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쉬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줍니다. 장차 하나님께 자기가 한 일을 낱낱이 보고 드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며 하지 않게 하십시오. 탄식하며 하는 그들의 일이 여러분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깨어진 관계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온전히 회복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부부이든 성도간이든 목회자이든 하나님이든 다시 새롭게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물론 하나님과의 불통은 신앙생활에 유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관계의 회복을 통해, 형통하는 멋진 인생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