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7):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사십시오.
삼상 6:1-2, 7-9, 12
‘멋진 인생’이라는 주제로 사무엘상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멋진 인생은 세상 가치관과는 다르게 사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고난 가운데도 주를 따르는 삶입니다.
멋진 인생을 사는 성도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분의 통치아래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보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겨 버립니다. 언약궤는 승전국의 전리품이
되어 다곤 신전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블레셋은 극심한 재앙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이 땅에 엎드러져 있습니다. 나중에는 신상이 박살이 나버립니다. 게다가 심한 독종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자
나름대로 꾀를 내어 다른 성읍으로 언약궤를 넘겨 버립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독종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언약궤를
들판에 두게 됩니다.
‘지방’이라는 단어 보다는 ‘들판’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들은 문제 거리인 언약궤를 들판에 아예 방치해 버립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블레셋은 죽은 신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체험합니다. 그렇다면 다곤이 아무것도 아님을 스스로
인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넘어지고 박살 나 버리는 그 우상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머리로는 맞지만 마음속의 자존심이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술의 고백은 더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과 생각보다 더 강한 영적인 뭔가가 인간의 정신세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들을
얼마나 강하게 결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 사슬을 끊어버리고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좋은 소식입니까? 이것을 ‘복음’이라 부릅니다. 이런
소식을 세상에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인간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예수만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첫째, 나는 주님이 흘린 십자가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진짜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이 사실 때문에 나도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명백한 고백을 내 입술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죽음과 부활을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예수 대신 동물이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보혈을 상징하는 동물의 피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동물제사가 자신들의 죄 용서함을 가져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제단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축복인 구원을 믿게 하기 위해 전쟁에서 승리, 병으로부터
치유, 배고픔으로부터 해방 등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원을 실제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제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너무나 쉽습니다. 사람의 착한 행위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먼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만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그 분 자체를 믿을 수 없고, 그분이 이루신 일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구원을 거부합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세상의 주권자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본 것들을 의심합니다. 9절을 보면 끝까지 독종이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저울질 하다가 언약궤를 돌려 보내고는 끝나 버립니다(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주님을 부인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이 여전히 죄와 사망의 저주 아래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하여 오늘 본문이 확실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분의 자리에 모시지 않을 때는 재앙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약궤를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 모시는 것만이 자신들이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칠 개월이나 지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이 아닌 블레셋에 있는 동안 그들의 일성적인 삶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블레셋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구약시대가 아닌 지금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는 없습니다. 성령이 대신합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 자리는 마음 속입니다. 하지만 성전이 있기 전까지 구약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을 이스라엘의 성막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서 이스라엘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한 인생은 심판뿐입니다. 두렵습니다. 걱정 근심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종이 되어 늘 죄짓는
곳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서 해방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복을 반드시 이 땅에서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내가 진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7, 14절을 보면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끄는 소는 젖을 먹는 새끼가 있고 임무를 마치면 번제로 드려집니다. 아무리 짐승일지라도 집으로 돌려 보낸 새끼가 생각나고, 조금 있다
죽게 될 것을 직감하면,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2절을 보면 길을 꿋꿋이 가며 그저 ‘울었다’고만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다 보면, 희생과 남들 모르는 억울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 다 사람들에게 말하며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입니다. 억울함과 원망을 눈물의 기도로 대신하며 묵묵히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멋진 인생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