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5): 하나님께 원인을 묻고 처방을 들어야 합니다 

삼상 4:2-11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거의 대부분 승리하지만 예외도 있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아이 성 전투였습니다. 작은 성이라 쉽게 이길 줄 알았는데 이스라엘은 패하고 물러납니다. 그 후 전쟁에서 패한 원인을 잘 해결하자 이스라엘은 다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발생한 전쟁 이야기입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4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잃게 됩니다. 모두가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3절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모여 그 원인을 찾아 냅니다. 어떤 일이든 잘 안되게 만드는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원인 분석에 이어 대책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원인을 찾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일반적인 절차입니다. 이들의 제안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를 냅니다. 5절을 보면 언약궤가 진영으로 들어오자, 의기소침 했던 이스라엘은 큰 소리로 환호하며 사기가 되살아납니다.    

 

반대로 블레셋 진영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7-8절을 보면 화가 자신들에게 미친 것을 알고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라면 이스라엘의 멋진 승리가 기대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그들 가운데 있다면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0절을 보면 1차 전투보다 7.5배나 더 많은 3만 명이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11절을 보면 이것보다 더 큰 일이 발생합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스라엘에게 없었던 언약궤를 적들에게 빼앗겨 버리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전쟁에서 진 것보다 더 큰 충격이 이스라엘을 강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대 사회에서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전쟁에 패한 것도 모자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적들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확실히 여호와가 이방신보다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거꾸로 돌아가보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온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면 요단강을 건널 때는 언약궤를 가져와 가장 먼저 들어가게 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는 무장도 않은 상태에서 언약궤가 적들에게 노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궤를 가져오자는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3절을 다시 보면, 언약궤를 가져가자고 제안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라고 말합니다. 패배의 더 근원적인 원인이 밝혀집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들 보다 훨씬 앞서 전쟁에서 패배한 아이 성 전투와 한번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7:6, 9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패해서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함께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씁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립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 원인을 듣고 그대로 이행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하나님께 패배의 원인을 직접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책을 직접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원인과 대책을 분석하고 내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신들의 눈에 좋은 대로 행하였던 사사 시대의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또 하나의 예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더 세밀하게 바라볼 것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후 하나님께 나아가 원인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기본을 놓치고 있습니다. 사사기 초기 때로 한 번 되돌아 가 보겠습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왔던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 시대가 막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땅이 그들 앞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과 전쟁을 하기 에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묻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 앞에서 기본적인 것이 지켜 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사무엘까지는 약 350-400년 정도가 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1884년에 처음 공식적인 선교사가 복음을 가지고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은 1620년 약 400년 전에 퓨리탄들이 신대륙에 도착하며 성장한 나라입니다. 좋은 것도 많이 생겼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기본적인 우리의 신앙자세입니다. 이것은 불변합니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며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일이 진행되고 잘 풀리지 않을 경우에도 하나님께 나아와 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것이 있는지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원인 분석인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소리가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잘못된 원인이라기 보다는 원망이 더 강하게 들려옵니다. 원망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생략하게 만듭니다. 기도해도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에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고 대안까지 내 놓았던 것입니다.

 

3절 후반부를 다시 보면, ‘언약궤를 가져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자는 제안입니다. 명확한 잘못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분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 되야 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이 미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 것은 회개뿐입니다. 그래서 7:6절을 보면 사무엘은 미스바에 온 백성을 모이게 합니다. 회개 운동을 일으키는 사역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또 신앙생활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본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나가야 할 하나의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12:23절을 보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죽고 싶을 만큼 큰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나아가 원인을 묻고 처방까지 듣는 신앙의 기본기를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멋진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