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4): 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삼상 3:1-4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무엘의 소명장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소명에 관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지금도 사람들을 계속 부르실까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면 누군가를 불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더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를 거쳐 왕이 세워지기까지 암울한 영적 상황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4, 6. 8절에서 세 번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엘리의 도움으로 겨우 네 번째 음성에 사무엘이 응답하게 됩니다. 사무엘은 어려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 제사장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해 볼만합니다.

  

제사장의 이런 모습은 그 당시 얼마나 심각한 영적 침체가 심각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말씀의 풍년을 맞고 있습니다. 영적 침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논리라면, 말씀의 풍년을 이루는 이 시대는 영적 부흥기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요즘 한국이나 일본은 태풍으로 엄청난 물 폭탄을 맞고 있습니다. 물이 넘칩니다. 그런데 진짜 먹을 물은 없어 군인들이 생수를 제공하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보곤 합니다. 말씀이 넘친다고 다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부르실까요?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사고와 사상이 혼합된 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물은 많지만 진짜 먹을 물이 없어 생수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으로 이끄는 말이 아닌,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것을 멈춘다면 내 삶은 어떨까요? 부름은 거룩한 부담인 사명을 동반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부름이 없다면 일단 육신은 편하겠지요. 일이 없기에 시간적 여유도 생기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더 찾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름 없는 삶이 정말 행복할까요?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 때 당시 엘리 제사장의 눈은 점점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신의 눈만 아니라 영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인 하나님의 이상을 보는 것과 백성에게 계시를 전하는 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이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하나님의 부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조차 감당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어린 사무엘을 통해 듣게 되는 처지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합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삶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생활에서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지요?

 

4절처럼 우리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낯선 거리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만 불러주어도 기쁩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조용히 부르시고 그분의 계획을 들려주신다면 내 신앙생활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3절에 사무엘은 언약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 잡니다. 2절에서 자기 처소에 누운 엘리와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것 성막 시리즈에서 배웠습니다. 결국 하나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잠자면 하나님 음성 들을 수 있나요?

 

사무엘은 자기 방이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약궤가 있는 성소에서 자고 있을까요? 27:21절에 의하면 성소의 등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꺼지지 않도록 제사장이 관리를 했습니다. 이 일은 늙은 엘리를 대신하여 두 아들이 맡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소홀히 하자, 사무엘이 대신 감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레16:34절에 의하면,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그 안에서 잠을 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근처 어디에서인가 잠을 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 누었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을 담은 언약궤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 누었다는 말은 1) 모두가 자고 불 꺼진 시간에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깊이 묵상하는 분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며, 기쁨을 회복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얼마 후 성경 일독이 마무리 되면 신약만 일독하는 광고가 올라 올 것입니다. 조인하셔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 누었다는 말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성소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자신의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교회에서 직분을 가졌다고 하나님 음성을 저절로 듣는 것은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성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혹시 자신의 실수로 등불이 꺼질까 염려하며 남들 잘 때도 자지 못하고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누가 이 아이에게 관심이나 가지겠습니까? 한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만은 마음에 맞는 신실한 종을 찾기까지 침묵하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그 사람을 사용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분만의 특별한 계획을 들려주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멋진 인생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