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인생(3): 세마포를 입은 사람 

삼상 2:11, 18

 

오늘 드디어 사무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그는 엄마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젖을 떼면서부터 바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멋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가 자신의 장래를 결정해 버립니다. 본인에게 묻는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모든 것이 처리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필요로 할 때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젖 떼는 나이가 3-4살 정도라고 해도 여전히 어리긴 합니다.

 

성경 역시 1:24 (‘아이가 어리더라’), 2:18절에 (‘어렸을 때’), 그리고 2:21절에도 아이 사무엘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부모를 일찍 잃은 상황도 아닙니다. 집안도 넉넉합니다. 집 나가고 싶어하는 그런 나이도 아닙니다. 재롱도 부리고 때로는 떼도 쓰고 싶었을 것입니다. 칭찬도 듣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2:19절에 의하면 겨우 일년에 한 번 부모를 만납니다. 긴 그리움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 짧습니다. 새 옷을 받아 입는 즐거움이 있긴 하지만, 엄마의 품을 더 그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고, 부모의 신앙 때문에 자녀가 희생되는 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인생은 불행할까요? 성경은 인간의 심리를 분석해서 기록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생이든지 하나님의 손길에서 어떻게 되느냐를 다루는 것입니다. 분명 아이가 겪을 수 있는 그리움도 눈물도 원망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 들면서 비뚤어져서 반항하고 방황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잠깐 언급한 엘리의 두 아들의 악행을 따라 할 수도 있습니다. 탈선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걱정하는 일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엇이 어린 사무엘을 멋진 인생으로 자라게 만들었을까요? 2:11절을 보면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 앞에서라는 말은 사무엘이 가장 영향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어지는 여호와를 섬기니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비록 어리기는 했지만, 그가 섬겨야 되는 대상을 확실히 알고 섬긴 것입니다.

 

나이가 문제가 안됩니다. 환경이 그를 비뚤어지게 만들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섬겨야 하는 대상인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삶의 축복입니다. 성도님들에게도 이 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섬기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상대가 아내이든 남편이든 성도이든 목회자이든 자녀이든 목원이든 상관없습니다. 내 눈에 그들의 부족함이 보이고 잘 못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지요? 입술에는 비난이 계속 흘러 나오고 있는지요? 너무 답답해서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는 허물 많고 실수하고 죄까지 짓는 사람들을 매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인간 속에는 지금 남의 허물과 죄를 보고 비난하고 있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누군가의 눈에는 허물과 실수투성이의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상대의 부족함이 보일 때 서로 도우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정에 부부가 있고 공동체에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고 정죄하는 시간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더 많아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라도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가 그의 앞에 있긴 했지만,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엘리를 보았다면 무엇을 보았을까요? 1:9절을 보면 엘리 제사장은 성막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왕처럼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모습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부러움의 대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무엘은 그런 엘리 제사장이 그의 앞에 있긴 했지만,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헌 옷을 버리고 새 것을 입어야 합니다. 헌 옷은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얻은 옷이기 때문입니다. 자수성가해서 얻은 재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남들 잘 때 노력해서 얻은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은근히 나를 드러내게 만듭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그런 옷이 아닌 다른 옷이 필요한 것입니다

 

2:18절을 보면 사무엘은 세마포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세마포는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또 다윗 왕도 법궤 앞에서 춤을 출 때 입었던 옷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흰 세마포 베옷은 예수의 보혈로 죄 용서함 받은 성도가 입는 옷입니다.

 

이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착한 행위나 공로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을 때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간다는 것 인정하는 사람들만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입게 된 이 새 옷 입으시고, 내가 수고하고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생의 자랑거리를 다 던져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허물보다 그들 속에서 일하는 하나님을 보기 바랍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옷을 입고 예수만 드러낼 때 멋진 인생입니다. 날마다 의 새 옷을 입고, 하나님 나라 섬겨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