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읽는 시대(5): 다섯째 인 

6:9

 


요한 계시록을 통해 앞으로 이 땅에서 일어날 재앙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이 말씀해 주는 것은 재앙들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심화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더 넓게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첫 출발은 흰말을 탄 자로부터 시작 됩니다. 이 땅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우리가 알고 믿던 진리가 흔들리면서 세상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붉은 말을 탄 자가 큰 검을 가지고 와서 이 땅의 화평을 제하고 전쟁을 가져옵니다.

 

이어서 셋째 검은 말 탄 자는 경제활동을 의미하는 저울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을 배고픈 기근 속으로 몰아갑니다. 네 번째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전염병을 가져오는 청황색 말 탄 자의 등장이었습니다. 이 때 땅의 1/4에 해당되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은 다섯째 인을 소개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말을 탄 자와 그가 가진 것들이 없습니다. 6:9절을 보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또는 예수를 증거하려고 하다가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이라는 말이 성도에게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순교가 일어난다고 보아야겠지요. 이것은 마 24:8-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을 보면 더 쉽게 이해 될 수 있습니다. 재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전쟁과 기근 등이 있는 그때에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환난에 넘겨주고 죽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이름 때문입니다. 1:21절에 의하면 예수라는 의미는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가 된다는 우리의 고백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왜 기독교만 유일한 진리냐?’ 고 늘 반문해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믿는 것을 진리라고 인정해 주고 제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고 제안합니다.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살 수 있는데 왜 유별나게 크리스천들만 진리라고 고집 부리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 되고 더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 잘못 타고나면 죽임까지 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맹수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평생 모아둔 재산도 몰수 당했습니다. 심지어 땅 속에서 살았습니다. 자녀들을 그곳에서 낳고 가르치며 허리가 굽어진 체로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아갔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세상에는 지금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카타콤이란 지하 무덤에서 살긴 했지만, 세상의 은둔자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성도는 믿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믿는 성도는 전부 집단으로 미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진정으로 진리를 믿고 사는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집단으로 미친 광신적인 종교집단들은 역사 속에서 간헐적으로는 나타났다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차이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순간적으로도 역사에서 사라진 순간이 없습니다. 이천 년이 넘게 지내오는 동안 지속적으로 믿음을 지켜 왔습니다.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고 자신의 주님으로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은 심지어 순교를 당하면서도 고백을 이어왔던 사람들입니다.  

 

2014년에 크리스천 히스토리라는 잡지는 데이빗B. 바렛트(dacid B. Barrtt)교수의 연구를 인용했습니다. 예수님 이후 기독교 순교자는 약 7천만 명이라고 합니다. 2022년 오픈도어 선교회의 연간 보고서(WWL: World Watch List)에 따르면 약 3억 명의 기독교인이 박해나 차별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는 믿는 사람 5명 중 1, 아시아는 5명중 2, 라틴 아메리카는 15명 중 1, 전세계적으로는7명 중 1명이 박해나 차별적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예수를 따랐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들에게 닥친 박해와 환란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켜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앞으로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 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생명 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를 위해 죽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우리는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믿는 것이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신성) 예수만이(인성)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내가 믿는 모든 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지금도 체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예수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를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실제 순교의 시간이 오면 진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순교자적 삶을 성도는 지금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순교자적 삶이 무엇입니까? 먼저, 지금 당장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죽을 수도 있는 진리를 붙잡고 오늘을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에 세상 어떤 구원관과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복음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보혈만이 나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입술로 고백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결국 내가 믿고 고백하는 것들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죽임을 당하게 될 수 있는 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 알고 사는 삶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순교자적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의지와 상식, 내 생각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신앙인의 태도를 순교자적 삶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 자아, 내 고집, 내 성질이 반드시 확실히 죽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씀에 따라 사는 모든 삶이 순교자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많이 내 양심이 찔리는지요? 순종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 변명과 이유들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순교자적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면 미래에 주를 위해 죽으라고 할 때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앞서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같이 우리도 순교의 때가 오면 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아직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면 순교자적 삶을 매일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예수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