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읽는 시대(3): 셋째 인 

6:5-6

 


마지막 때에 일어날 극심한 재앙들을 살펴 보면서 믿음의 성도인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 인을 뗄 때 흰 말이 등장했고, 그 탄 자는 손에 활을 들었고 머리에 면류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 탄 자가 한 행동은 이기고 이기려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 백마를 타시고 검을 가지시고 머리에 관을 쓴 주님을 모방한 적 그리스가 분명합니다.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길 수 없기에 최대한 타격을 주려는 영적 대혼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미 세상에 나타나서 절대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종교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 왜 꼭 세상은 기독교 이어야만 구원 받느냐? 다양성을 짓밟아 버리는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처럼 진리는 하나만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등 여러 질문들을 던지며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둘째 인을 뗄 때 붉은 말을 탄 사람이 큰 칼을 가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인류에게 가장 처참하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땅의 평화를 거두고 서로 죽이는 대량학살 등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토록 큰 고통을 줄 수 있느냐?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그 사람들을 모두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 따집니다. 인간은 너무 힘든 고난 앞에 원망하며 무너집니다. 둘째 인은 전쟁 그 자체라기 보다는 외형적 고난이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믿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세 번째 인을 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6:5절을 보면 검은 말이 등장하고 그 말 탄 자는 저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검정색은 암울함을 느끼게 합니다. 검은 색은 애 5:10절 말씀처럼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라는 기근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저울은 실제로 무게를 다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이 저울이 레 26:26절과 겔 4:10절에서와 같이 때로는 기근을 상징화 하는 도구로 사용되곤 합니다. 오늘 본문 6절 하반부에서도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는 말 역시 기근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하루 일당입니다. 그것으로 밀은 한 되, 보리는 석 되를 사는데 다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한 되는 약 일 리터(1.08 리터)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식량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일당이 한 사람의 하루 먹을 거리로 다 소비 된다는 것입니다. 평상시보다 열 두 배 혹은 그 이상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자녀들이나 가족이 있는 경우는 밀 보다는 세 배나 더 살 수 있는 보리를 구입해서 먹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삶에 필요한 다른 의복비와 주거비는 고려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극심한 기근 상태로 인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되는 것을 암시합니다(전쟁->기근->? 질병).

 

한편 이런 상황에서도 6절 하반부를 보면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합니다. 먹을 거리가 줄게 되면 사람들은 감람유와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양식을 위해 곡물을 심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그런 일이 벌어질 만큼 심각한 기근 상태는 아님을 암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도하며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기근이 지속될 때 기아와 빈곤의 문제가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사람의 부의 불균형으로 계층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라 불리는 이런 힘든 시간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른 사람 배고픈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야!’ 크리스천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은행 계좌를 하나를 더 가지고 살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것을 눅 12:33 절은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라고 부릅니다.

 

19:9-10절에서는 추수시기에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과실을 다 수확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리나 밀 밭에도 그들을 위해 어느 정도 남겨두고 추수를 하게 합니다. 14:28-29절에서는 3년에 한번 더 십일조를 하여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들을 돕도록 명령합니다.

 

시대가 달라졌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책임지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요즘 세상은 글로벌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웃들도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계은행의 2020년 보고에 따르면, 전세계 인구9.4%의 인구가(70억의 약 10% 7억 명) 하루 1. 9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극빈층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만나 보지도 못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입니다.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달에 한번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실제로 동참해 보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말세에 이런 어려움들을 경험하는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첫째 인은 영적 혼란기에 믿는 성도들에게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만 인정하고 살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두 번째 인은 전쟁이라는 공포와 삶의 파괴 가운데서 절대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를 도전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 번째 인이 주는 극심한 배고픔의 경제적 어려움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30:9절에,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 존재조차 무시하는 교만하고 완악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분명 부패한 인간 본성이 극에 달하는 모습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의 부요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소유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주신 목적을 잘 알고 공동체와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세 때에는 이런 나눔 조차도 어려워지는 환경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나눌 수 있었던 사람들조차도 가난해지면 잠 30:9절 하반부처럼 도둑질하는 죄를 범해 하나님께 영광 가릴 수 있음을 경고해 줍니다. 결국 오늘 세 번째 인은 극심한 삶의 환경이 인간의 양심까지도 팔아먹는 세상을 소개합니다. 그런 세상에서도 정의롭게 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라는 말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으로부터 불림을 받고 난 뒤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는 그 날까지 우리는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