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7): 순종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롬12:1
구원은 ‘예수를 믿어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확신이 성도에게는 분명해야 합니다. 죄 사함으로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은혜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구원 받은 성도의 새로운 삶은 정말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는 구원에 대한 이론 보다는 주 안에서 변한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구원은 죄로 죽었던 내 영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내 주인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들입니다.
이전 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생각과 삶이 달라졌습니다. 예수
믿고 달라진 모습은 나아가는 방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일에 산으로 바다로 가던 내 삶이 예배당으로
향합니다. 목숨 걸고 잡으려고 했던 부귀와 명예와 욕망을 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직 안 되면 주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신 삶이 아닙니다. 성도는 거룩함과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갑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
풍조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를 폄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보다 우선 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 뜻보다 더 중요시 여겨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순종의
바울은 이런 태도를 롬 12:1절
하반부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이며,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합당한’ 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배’라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성도의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성도의 합당한 행위일까요? 바로 앞 부분에서 언급되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몸’은 단지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 마음, 의지, 가진 소유, 능력, 야망, 모두를 총괄하는 ‘나의 모든 것’
입니다.
그리고 ‘드린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마음대로 하게 하게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맡긴다는 법적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알고 그분이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를 온전히 다 드리고 사시는 지요?
내 주장 포기하며 주님 앞에 늘 서는지요? 나보다 더 뛰어난 생각으로 앞서가는 분이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뭉개버리고 이것을 하라고 명령하는 주인이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적합하겠습니까? 내 생각을 의견으로 제시는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내
생각 강하게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모두 주인 앞에 선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 마음의 생각과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지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주 앞에 나가 내 의견을 나누고 주인 되는 주님께 묻는 기도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누가 높고 낮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가 목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목사가 성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단지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나와 다른 의견이 나올 때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의견대립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한 결정 방식에 따라 결정되면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가 만든 어떤 제도나 어떤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성도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제도를 가지고 운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그분의 뜻에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말씀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또 선지자를 불러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 이후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서로 생각을 나누고 고민하며 뜻을 찾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수로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이 제도화 되었습니다. 때로는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다수가 되는 위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다수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늘 옳다고 믿고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믿음으로 결정한 일에 하나님은 선하게 역사하셔서 바른 길을 가게 만드십니다.
아무리 다수가 선택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과 틀린다면 누군가가 틀렸다고
말해주고 고쳐 나가게 할 것입니다. 그래도 고집대로 한다면 하나님이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겠지요. 그렇다고 소수가 늘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나의
아집과 고집을 꺾고 순종을 배우는 계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사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제비 뽑기를 하면 어떨까요? 문제는 여전하다고 생각됩니다. 내 생각과 다른 제비를 내 손으로
골라 낼 수도 있겠지요. 이때 내 생각과 다른 것을 고르게 한 하나님이 싫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내 생각과 다른 것을 고른 나 자신을 미워할 수도 있겠지요.
또 내 생각과 같은 것을 뽑지 못한 다른 분들을 원망할 수 있겠지요. 어떤 제도를 사용할지라도 문제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수를
차지한 분들도 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소수에 대한 겸손을 갖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소수 의견을 낸 분들의 행동은 또 어떠해야 될까요?
다수 사람들의 뜻이 하나님의 생각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두려움과 그 결정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라고 말합니다. 결국 순종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 역시 ‘산 제물’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산 제물’은 동물을 드리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몸)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번제 동물처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산 제물’이라는 의미는 ‘내
주장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뜻과 달라도 죽은 사람처럼 내 뜻을 물리고 순종하는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하반절에,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을 다시 보면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단지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마음 의지 가진 소유, 능력, 야망 모두를 총괄하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드린다’는 말은 ‘마음대로 하게 하게하다’의
의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완전히 맡긴다는 법적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알고, 그 분이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성도의 합당한 행위입니다. 나는 이미 주 안에서 죽었기에 내가 하고 싶은 ‘소리’는 없습니다. 오직
나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고 싶어 하는 ‘주의 뜻’만이
있습니다. 나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사로 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