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5): 구원에 대한 두려움
롬8:35-37
구원은 받았지만 늘 성도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구원 받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환난이나 핍박이 다가올 때 내가 과연 주님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예수님도 요 16:33절 하반부를
보면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요 16:33절 상반부에서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핍박과 환란 가운데도 성도들이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성도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기 때문이고,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문제는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롬 8:36-37절을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구절을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를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때문에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이 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요일 5:4-5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성도를 말합니다.
2)성도는 세상을
이긴다고 말합니다. 3) 그 비결은
내가 구원받을 때 믿었던 그 믿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그때 무엇을 믿었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와서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과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믿음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붙잡는 것입니다. 죽으심은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심은 나의 죄가
확실히 용서 받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성도이며,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믿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에 넉넉히 우리가 이기도록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 믿게 되면 자동 시스템이
내 속에 설치 된다고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 믿고 여전히 죄를 지을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의롭게 되는 죄 용서함입니다(오해 말 것은 구원파 구별).
나머지 하나 더 자동 시스템이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환란이나 핍박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자동으로 공급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면 두려움이 다가올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담대함이 하늘로부터 공급 된다는
것입니다.
히13: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고후 4:8-9절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을 알고 나를 도와 주시고, 힘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니 살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놀라지 말고 겁내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그냥 감격하고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힘들어도 기뻐하는 지요? 짜증나도 기도하는지요? 잘 안 되어도 감사하는 지요?
앞으로 성도들이 정차 당할 모습을 롬8:36절에서는, ‘이 세상에서 마치 도살당할 양 같은 처지에 있다’ 고 말해줍니다. 불쌍해 보이는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긴다’
고 37절에서 반전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은 ‘승리 이상의
승리를 한다’는 뜻입니다. 겨우, 간신히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NASB는 ‘압도적으로
승리한다’는 뜻으로 ‘overwhelmingly conquer’로 제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칠 신앙적인 고난을 이기는 방법을 다르게 말하면 내 힘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의지한다고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능력이나 지혜나 지식에 의존하는 승리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가진 무한한 능력을 믿을 때, 완전한 승리가 보장됩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가 최고처럼 보이듯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믿고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살아가는 현장에서 훈련 되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손해를 가져와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믿음은,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우리를 얼마만큼 사랑해 주셨습니까?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분입니다.
구원이라는 가장 큰 것을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이
땅에서 내가 잠시 당하는 고난이나 핍박, 환란을 넉넉히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삭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유목민에게
우물은 생명입니다. 가축은 풀도 필요하지만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는 일이 생기면 그냥 줍니다. 다른 곳으로 가도 우물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 전체를 영원히 주신다는 하나님의 더 큰 약속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삭을 괴롭히지만 그 사람들은 나중 이스라엘의 종이 될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만 믿고 핍박이 오면 믿음으로 한 고개씩 넘어갔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은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제도 아니고 지금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 창세 전에 계획되고 베푸는 사랑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성도만이 누리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넉넉히 이겨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