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5): 우리에게 위로자가 계십니다 

51:7-12

 


살다 보면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한계라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지만 할 수 없는 벽을 만날 때, 그 벽을 우리는 현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현실은 내가 살아가는 실제의 삶을 말하기도 하지만, 해결 못하고 넘어갈 수 없고, 극복 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말할 때도 사용하곤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자신에게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수 많은 한계들을 만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계는 대충 두 가지 정도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부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 받으려고 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가장 좋은 예는, 개인이나 기업의 파산이 해당 되겠지요. 자신이 가진 것 다 사용하고 남이 가진 것도 활용해 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재화나 자본은 무한대의 공급과 보충은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아무리 주위 사람들이 도와 주려고 해도 자신이 갖는 한계성도 있습니다. 훌륭한 선생님이 제자를 가르쳐도 자신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학생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이 못 미치거나 아니면 너무 긴 시간이 요구될 때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계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 것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느낌조차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급자족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만큼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돈 자체가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 일찍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만족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다지 세상에서 경쟁하며 느껴야 하는 능력의 한계를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하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 부딪히게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연 앞에 선 인간입니다. 며칠 전 바다 한 가운데서 지진이 나서 밀려오는 쓰나미 앞에 모두 무력합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으로 막아 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합니다.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한다고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것이 인생에서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재산은 물론 인명 피해도 계산이 안될 정도로 엄청나게 큽니다.

 

아마도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한계를 다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공합니다. 그때 유다는 애굽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공불락이라는 예루살렘 성 안에서 긴 시간을 버터 보았지만 방어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나오고 예루살렘의 벽이 뚫리고 도망자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유다 백성들은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긴 세월 동안 억압에서, 종살이에서, 포로라는 처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자녀들까지도 남의 땅에서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이 말해주는 유대인들이 직면했던 현실입니다. 현실은 때로는 이렇게 참혹합니다. 너무나 슬픕니다. 몸부림 쳐 보지만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다들 20절을 보시면 유다 포로민들의 모습을 가장 잘 말해 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그물에 걸린 영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물에 걸린 사슴도 늘 상 다니던 길을 그 날도 갔을 것입니다. 목이 말라 물 마시러 왔는데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잡기 위해 그물을 쳐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잡힌 먹이를 풀어주겠습니까? 난감합니다.

 

그물이나 올무에 걸린 짐승을 보신적이 있는지요? 처음에는 자신이 그물에 걸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힘을 소진할 때까지 몸부림치며 벗어 나기를 시도합니다. 그러면 온 몸을 휘감은 그물은 더 목을 조여옵니다. 나중에는 힘도 없어 몸부림조차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다 포로민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지요? 전 세계가 2년이 넘게 코로나로 일상에로의 회복에 발목이 잡혀 있습니다. 각처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나 미국 경제상황,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보아도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것들 외에 교회나 가정과 개인이 만나는 현실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반응입니다. 7절처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의 백성들은 첫째, 어떤 현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8절을 보면,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들에게까지 영원히 미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은9-10절에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가게 하신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12절은 우리의 위로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자 되시며 위로자 되심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갈 수 있게 능력의 팔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7절에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의를 아는 자들이라 부른 이유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는 현실을 만날 때는, 하나님의 팔 뿐이라는 믿음이 우리의 두 번째 반응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라고 외치는 마지막 간구가 있기를 원합니다.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른다는 것은, 우리 앞에 가로 놓여 있는 막막한 현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응징한다는 뜻입니다.

내 힘으로는 뚫고 나갈 수 없는 애굽과 홍해와 같은 장애물이나, 풀리지 않는 한계와 문제들이 있는지요?

 

이 현실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주여 능력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한계를 깨드려 주시옵소서. 주 안에서 해결되고 물러가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자들에게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크고 비밀한 일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가정이, 교회가 처한 어려운 현실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회복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는지? 그 약속을 그대로 믿고 있는지? 그리고 부르짖고 있는지이 세 가지를 지금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힘든 상황에 있었습니다. 나라 잃은 수치와 굴욕감으로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던 여호와 하나님 마저 그들을 포기했다는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구원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 인류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들을 구원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질고와 슬픔 가운데 살아갑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런 우리들을 위해 친히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모든 인생에게 덮여 있는 죽음의 그물, 사망의 올무를 풀어주기 위해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실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떤 문제와 한계 앞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절망시키는 문제가 있을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을 절대로 함몰시킬 수 없습니다. 나와 가정과 교회를 둘러싼 현실은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이기에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현실(그물)은 누군가가 와서 걷어 버리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홍해와 같은 현실이 있을지라도 길을 만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주님만이 아픔을 위로해 주십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절망가운데서 부르짖는 것이고, 실제로 한계를 극복하는 체험이 있는 삶입니다. 11절처럼,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노래하며, 기쁨으로 충만하고, 슬픔과 탄식이 떠나가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