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2): 은비한 새 일을 행하십니다.
사 48:1-6
2년이라는 긴 팬데믹을 지나면서도 간혹 희망을 주던 소식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기다리던
백신이 개발 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왔습니다. 첫 백신투여가 2020년 12월 14일 뉴욕시 흑인 간호사 샌드라 린치가 접종을 시작하면서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알약 치료제까지 개발 되었습니다.
사실상 지금은 위드 코로나 시대에 들어왔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변이로 인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지루하고 긴 시간의 싸움을 싸워가야 할 것입니다. 힘들어 하는 분도 있고 많이들 지쳐 있습니다.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현실에 직면해 있는 모습이 우리들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오늘 본문에서 만납니다. 그들 역시 곧 풀려 날 것이라는 소문은 많지만, 실제로 포로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둘러 보아도 페르시아 고레스 왕에 의해 나라들이
복속 되고 남은 것은 바벨론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앞의 두 장 46-47장에서 담대히 ‘바빌론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까지 외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너질 나라는 조그마한 흔들림조차
없습니다. 쳐 들어와야 할 고레스 군대의 말 발굽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포로민들이 바라는 시간은 오고 있지 않았습니다.
회복이 느려지자 모두들 답답해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들이 팬데믹이 언제 완전히 사라질지 기다리고 있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들이 터지며, 문제가 장기화 될 때 사람들은 지치게 됩니다. 소망을 잃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약속조차도 불신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선지자의 목소리를 사람의 소리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환경에
매몰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실까요? 너무나 놀랍게도 6절을 보면 “이제부터
내가 새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징계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대하는 이유가 정말 궁금합니다. 그러나
먼저 은비한 새 일이 무엇인지부터 아는 것이 시급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14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는
말씀 속에 나타납니다.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역사적으로
문맥상으로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새 일’은
페르시아를 통한 바벨론의 멸망을 뜻합니다.
70년의 오랜 기간 동안 종살이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멈추고 이제 구원하시겠다는
선포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힘들고 지쳐있던
사람들에게 고난이 물러가고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문제가 풀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힘들어 하는 상황을 오래 두고 보지 않고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축되고 지쳐 있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위로와 소망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힘든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결국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너지고, 나의 바램이 실현되게 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현실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만약 내가 오늘 어려운 가운데 있고, 이 말씀이 나에게 위로나 소망이
된다면, ‘하나님이 내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올려 드리는 이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은밀하게 행하시는 새 일은 다름 아니라
힘들고 죽을 것 같은 삶의 한 가운데서 나를 건지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사실 새 일이 무엇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새 일을 행하느냐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새 일이 일어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도 모르게 새 일을
행하는 첫째 이유는,
9절에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또 한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로채 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10절 말씀처럼
연단을 받을 만큼 받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당연히 이런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과 뜻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남는 희망은 하나님 백성들뿐입니다.
하나님 자녀들만이 ‘이 모든 일을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20절을 보면,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주며 땅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선포를 해야 할 이스라엘마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에 빠져 힘들다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행하실 새 일에 대해 기뻐하며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는 현실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4절에서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며 네 이마는 놋”이라고
말씀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입술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오지 않고,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멈추어 버린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과학이 해 냈다’고 말할 것입니다.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광을 돌리는 일이 가능하려면 우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를
위해 새 일을 행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 대로 우리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은 1절에서처럼 타고난 성품의 ‘야곱’이 아닌 영적으로 거듭난 ‘이스라엘’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다’는 의미는 메시야가 나올 선택 받은 백성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우리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기념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며, 성령을 따르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정체성을 가진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진실되고 공의롭게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우리 믿음의 삶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 되는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성실하게 선포하고 있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임을 세상에서 인정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드리는 예배 가운데, 그런 하나님을 우리 입술을 통해 고백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힘든
팬데믹을 지나면서 우리들에게 생긴 경제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문제들을 물러가게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임을 정말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는지요?
성도는 17절처럼
하나님은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시고 나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선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2절을 보면 그런
우리들을 향해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며 ‘저 사람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면 산다’고 부러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21절처럼
우리가 ‘사막을 통과할 때에도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바위를 쪼개어 목마르지 않게 은비한 일을 행하십니다. 성도는 어려울 때 22절의 악인들처럼 평강을 잃어버리고, 막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예수 십자가
구원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만이 소망을 잃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새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은비한 새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약속 더욱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