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4): 모두가 다음세대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3:15-4:3


 

유명한 가문일수록 후대에 남겨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좋은 가훈도 집터도 남깁니다. 그리고 명예도 계속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자녀들을 교육시키곤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경주 최부자 댁은 ‘100(40km)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좋은 전통이나 특히 큰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후손들이 대대로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신앙을 자손 만대에까지 이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요단강에 대해 잠깐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사해까지 이르는 강입니다. 평소에는 수심이 1m 정도이고, 넓이도 30m에 불과하지만, 봄철 우기에는 3-4m의 수심과 1.6 Km 에 이르는 강이 된다고 합니다.

 

해발 2800m에서 녹은 물이 해면보다 200m가 낮은 갈릴리와 400 미터가 더 낮은 사해에 이르기까지 낙차가 심해 강의 유속은 대단히 빠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이곳을 여행하는 분들은 물이 졸졸 흘러가는 모습에 실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여호수아 이야기는 따지고 보면 정말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전 천년 전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윗으로부터 또 오백 년 전 사람입니다.

 

모세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여호수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으로부터 거의 3500 년 전 이야기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천 년이 넘는 이 긴 시간 속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단 강물이 쫄쫄 흘러간다고 해서 여호수아 시대에 요단강에서 기적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분명히 일어났습니다. 만약 요단강이 그냥 발목 정도만 물이 흐르는 그런 시내였다면 성경의 기록자들은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 앞의 요단강은 곡식을 거둘 시기이면 항상 둑을 넘친다고 한다. 그런데 왠일인지 이스라엘 200만이 도착한 곳은 그렇지 않다. 정말 감사하게도 어린아이들도 그냥 건너갈 수 있게 물이 거의 말라있다.” 이 정도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 요단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어떤 책인가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합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라면 나쁜 이야기는 빼고 좋은 것만 남겨 둘만도 합니다. 그러나 살인 간음 질투 싸움 근친상간까지 정말 빼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도 있는 그대로를 기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합니다. 나중 여호수아 7장에 나오지만 전쟁터에서 노획물을 숨긴 아간을 찾아내 죽이는 하나님입니다. 거짓을 찾아내어 스스로 공의롭고 정의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님이 스스로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하게 허락하겠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 오늘날의 관점으로 읽으면 의심 가는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 앞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것은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의심이 생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지혜롭게 대처하는 예를 하나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600-500년 전 느부갓네살에 의해 건설된 신바벨론 제국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시대입니다.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로부터 약 100km 남쪽으로 떨어진 곳입니다. 이 도시는 독일 학자 콜데바이에 의해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발굴이 되었습니다.  

 

발굴 당시 바빌론은 모래 땅 20미터 밑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성벽 두께는 7m 이고 높이는15미터가 넘었습니다. 15 만 명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런 엄청난 도시도 시간이 지나자 땅에 묻혀 버린 것입니다. 이보다 천 년이 더 앞선 여호수아 때는 지금보다 더 다른 모습을 우리는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그때와 다른 지금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3:16절에 의하면 요단 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강 상류에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5절에 의하면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물이 온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제사장들은 강둑을 넘는 물을 보고 다들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강물 속으로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두려움으로,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3:13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셨기에 그대로 믿고 담대함으로 행한 것입니다.

 

결국 온전한 믿음이 순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순종하기 힘듭니다. 자발적으로 한다고 해서, 또 용기 있게 나선다고 다 순종은 아닙니다. 믿음에서 출발해야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내 기분 좋으면 하고, 할만 하면 따르는 것 순종 아닙니다. 늘 순종은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순종을 기뻐 받으시고 기적까지 허락해 주십니다. 13:58절을 보기 바랍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했을 때의 말씀입니다. 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느냐를 제사장들은 보여줍니다. 3:17절을 보면, 제사장들은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아이들, 어른들 그리고 가축들이 다 건널 때까지 강 한 가운데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들에게 두 가지 부담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는 강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 강심장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물이 자신들을 덮칠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지나가기까지 6시간 정도 걸렸다고 추정을 합니다. 어깨에 법궤를 매고 있는 것이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가만히 한 곳에 서 있는 것도 지칠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메고 반나절 정도를 서 있다는 것은 대단한 체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불평하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흔들림 없이 백성들이 다 지나기까지 요단강 가운데 서 있었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의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순종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해 주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평강입니다. 물이 언제 자신들을 집어 삼킬지 모르는 상황에도 허락해 주시는 평강으로 모든 시간을 넉넉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먼저 요동하지 않아야 백성들이 안심하고 강을 건너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믿음의 공동체를 안정되게 만들어 줍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으면 공동체는 사탄이 좋아하게 분열되고 싸우고 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더욱 우리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자리잡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test)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이 아닌 내가 처한 상황을 지금보다 더 어렵게 한다는 뜻입니다. 4:1절을 보면 하나님은 백성들이 다 건넌 후에 바로 제사장들을 강 가운데서 철수시키지 않습니다.

 

모두 지쳐있는데 새로운 명령을 주십니다. 4:2절을 보면 하나님은 각 지파에서 열두 사람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4:3절에서는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돌을 각각 하나씩 취하여 그들이 유숙하게 될 곳에 두게 합니다. 또 하나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제는 제사장들이 아닌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여기서 열두 지파가 주는 의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순종은 특정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순종에는 한 가지 더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번 순종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 번은 영원한 순종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4-5절을 보면 미리 선별된 열두 명은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옵니다. 이 돌들은 나중 후일에 자손들에게 기념물이 될 것이라고 6-7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일을 기억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이 이룬 위대한 일은, 순종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미래 세대들에게 계속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순종은 일회성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만 있어서도 안됩니다.

 

내 평생을 통해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요단강을 건넌 날은 4:19절에 의하면 첫째 달 십일입니다. 12:2-3절에 의하면 40년 전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을 준비해서 먹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순종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40년 뒤 순종을 통해 또 한번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첫째 달 십일은 오늘날 3-4월입니다. 눈이 녹고 봄비로 인해 요단이 범람하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장 건너기 힘든 시기에 요단을 건넜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가장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넘어가게 만들어 줍니다. 이 순종이 우리 세대를 넘어 자녀들에게도 대대로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