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3): 합리적인 의심도 극복하십시오 

3:1-6

 


순종은 힘이 듭니다. 10대에는 사춘기라서 부모님 말씀을 참 순종하기 힘들었습니다. 20대에는 이제 나도 어른이라는 생각으로 어른들 말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30대에는 내 힘으로 살기에 다른 사람들 말에 순종하기 힘들어졌습니다. 40대에는 내가 이룬 것 보면 내가 맞다는 생각에 순종하기 힘이 듭니다.

 

50대에는 내가 최고인 것 같아 순종하기가 힘이 듭니다. 물론 성도님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을 보면서, 60이 되면 어떨지 기대가 되고,

죽을 때쯤이면 많이 변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성경인물들을 보면 순종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고 새로운 리더십을 세우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그들에게 준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싯딤에서 정탐꾼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1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싯딤에서 요단에 이르는 거리가 12km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서 도착할 것을 고려해서 그렇게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요단에 도착하고 바로 그 다음날에 건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2절을 보면 사흘이 지나갑니다. 물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면서 이들이 자신들 앞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물이 조금 줄어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5절을 보면 요단은 언덕을 넘치며 흘러가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요단은 ‘평소에는 30m 정도의 너비에, 1-3미터 깊이’라고 합니다.

 

그럴지라도 물살이 빠르고 거칠어서 건너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리 추수기입니다. 이때는 북쪽의 헐몬산의 눈이 녹아 강은 범람하게 되고 강 넓이는200-1000미터가 되어 건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착잡한 심정으로 강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1:18절에서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다짐까지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엄청나게 불어난 물로 인해 넘치는 강을 건넌다는 것은 너무 위험스러 보입니다. 이 판단은 그냥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눈에 보이는 합리적인 근거에서 내린 불가능이라는 판단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강을 안 건너는 것이 정상입니다. 누구나 다 동의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관리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받아 진중으로 돌아 다닙니다. 3절에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강을 건널 구체적 행동지침까지 명령합니다. 백성들은 그 명령에 따라 물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노약자나 어린 아이들을 위한 구명조끼 하나 없이 말입니다.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무모한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합리적인 의심을 어떻게 잘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참 궁금합니다. 그리고 정말 알고 싶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내 속에서 일어나는 합리적인 판단에서 내려진 의심까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더 강한 하나님을 이미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도 가능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중요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나도 모르게 의심이 사라지게 만들고 불신을 이기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들과 홍해 기적을 체험한 부모 세대들이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조금 더 쉬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홍해가 갈리지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부모님들과 조금 다른 것이 있습니다.

 

비록 홍해를 가르는 큰 기적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잔잔히 경험해 오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목이 말라 울 때 부모님들이 모세를 보며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역사를 어릴 적 경험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한 것보다, 물이 나와 목마름이 없어졌다는 것만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이들도 하나님과 함께 함을 하나씩 경험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쯤 이들은 가족을 대신해서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전쟁에도 나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기도 없고,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들이 참 용감하게 싸워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 올라 손을 들면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금씩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얼마나 강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지요.

 

이런 작은 경험들이 쌓여 지금은 무모하리만큼 여겨지는 사건의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그냥 강 속이라도 들어가는 사건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순종이 이 사람들처럼 쉬워지지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들이 개인에게도, 가정에도, 우리 교회에도 점점 쌓여 가야만 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있지 않으면 조그마한 하나님의 요구에도 여전히 순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작은 것부터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어 보기를 도전 드립니다. 제가 ‘작다’고 하니 무슨 의미인지를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신앙생활의 기초를 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와 말씀 찬양의 예배자의 삶입니다. 이것 없이 어떤 것도 성도는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생활에 도전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로 시작하고 감사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일년에 한번은 성경을 꼭 일독하겠다.

 

지금은 우리 교회가 하는 성경일독은 개인이나 아니면 부부가 함께 하는 경우까지 왔습니다. 올해 5장 팀은 10월에 이미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10장 팀은 11월 말 정도에 일년에 2독을 완료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내년 1월부터 다시 새롭게 일독이 팀 별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우리 자녀들까지 포함해서 전 가족이 한번 도전해 보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신앙의 추억을 만들며 사시는지요? 일년에 일독 성경읽기가 가문의 전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 자손만대 복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비결은 3절을 보면 언약궤를 따라가면 쉬워집니다. 언약궤 보다 앞서가지 않으면 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시에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전에는 내 스스로의 판단으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눈에 보이도록 언약궤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자신의 열정이나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큰 위험 때문에 그렇습니다.

 

4절 말씀처럼 우리는 가 보지 않을 길을 하나님보다 먼저 앞서 가게 되면 가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가보지 않은 위험한 길에 안내자가 되어 앞서 가십니다. 그래서 3절 말씀처럼 레위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그 뒤를 따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가 보지 않은 길은 너무나 위험한 장애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강한 적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전쟁을 위해 국가에서 상비군으로 길러진 군인들이 아닙니다. 가나안 사람들처럼 방어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성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앞서가면 그들은 적들의 밥이 될 뿐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지에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가시면 우리보다 더 강한 적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가 있고, 정당성이 확보 되었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의 열정이나 열심으로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힘으로 나아가면 내 것 다 쓰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획한 것 완성해 내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은 조금 지나면 바닥 납니다. 내가 가진 건강은 별 것 없습니다. 며칠만 잠 못 자도 신경쇠약에 걸리는 우리들 아닙니까? 내가 가진 명예 오래 가던가요? 조금 실수하면 비집고 들어오는 경쟁자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 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갖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나의 동역자가 되고 뒷배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순간마다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그 안내자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제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갈 수 있느냐고 질문할 차례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한 모든 분들에게 성령을 허락해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일어나 이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체험을 가져본 분들은 알 수 있습니다. 미세하게 들려 오지만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우리 마음을 움직입니다. 생각을 주십니다. 그리고 일어설 힘과 현장에서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게 만듭니다. 결국 언약궤를 따르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속에 성령으로 내주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믿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5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결’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거룩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누군가 외적 강제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자발성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했다면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관계되는 사람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구별을 통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세상적 사고나 철학 세계관이나 시대적 조류에 지배 당하지 않고 늘 우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 산에 사는 삶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살지만 종속되지 않고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유투브를 보지만 그것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휴식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잠시 오락을 즐기긴 합니다. 그러나 빠져 나오지 못하고 도박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 중에는 세상 것을 이용해 크리스천 문화를 만들어 내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결해야 하는 이유를 5절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기인한 일, 즉 요단 강을 건너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기 이전에 성결을 요구하신 것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조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기적인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거룩에 의해 제한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민족을 만들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400년 전에 창15:16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으로 그 뜻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을 멈춘 것은 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삶이 구원 얻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의 합당한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계속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복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일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속에 내주하며 이끄는 성령님께 나를 내어 드리기를 도전 드립니다. 그리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며, 늘 기적과 같은 삶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