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2): 두려워하면 쉽습니다 

2:1-11

 


신앙생활에서 힘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순종이 왜 그리 어려울까요?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우리 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은 하나님 말씀에 핑계거리를 데고 거부하거나 거절하게 만듭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불순종은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때 먼저 하나님은 담대하라고 늘 명령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보여집니다. 먼저는 여호수아이며, 다음은 그가 보낸 정탐꾼들입니다. 모세가 죽고 난 뒤 새로운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 후속 조치로 1절을 보면, 그는 먼저 정탐꾼 두 명을 여리고에 은밀히(번역에 생략) 보냅니다.

 

전쟁에 능한 여호수아는 가장 강력했던 가나안의 중부를 먼저 공략합니다. 적들을 남북으로 갈라놓고 연합을 막으려는 의도인듯합니다. 40년 전에도 모세는 12명의 정탐군을 보내 가나안에 대해 알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는 높은 성벽과 자신들보다 더 크고 강한 적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많은 시간이 흘러 적들을 두려워했던 세대들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새로운 정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비록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서 스파이들을 보내긴 하지만, 여전히 적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두 정탐꾼 역시 적지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노출되지 않을 장소를 선택합니다.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인 기생 집으로 들어 갑니다. 스파이들이 주로 하는 행동이긴 하지만, 정탐꾼들의 깊은 내면에도, 역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합니다. 여리고 사람들의 철저한 대비 때문인지, 2절을 보면 이들은 현장에서 신분이 노출됩니다. 3절에서는 여리고 왕이 보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라합의 집으로 들이닥칩니다. 여기서 어떤 결정을 할지는 라합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4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녀가 그들을 미리 숨겨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나중 수색에서 발각될 경우를 고려하면, 당장 배신도 가능합니다. 적을 숨겨준 것은 죄가 될 수 있지만, 나름대로 대책도 있습니다. 1) 4절을 보면 그녀는 자신의 집에 정탐꾼들이 온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부터 온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했다고 잡아 떼면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2) 자신은 그들을 숨겨주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가 지붕으로 올라가 6절처럼 삼대 속에 숨었다고 거짓말 할 수도 있습니다. 3) 아니면 정탐꾼들이 자신을 죽인다고 위협해서 어쩌 수 없이 그들을 숨겨 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더 중요한 것은 수색을 하기 전에 두 정탐꾼을 내어준다면 그녀의 모든 말을 진실로 믿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라합은 정탐꾼들을 여리고 사람들에게 넘겨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그들을 넘겨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첫째 증거는, 그녀와 정탐꾼들 사이에 돈을 받고 반대 급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스스로 이들을 숨겨 주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또한 8절을 보면, 시간상으로 추격자들이 돌아가고 어느 정도 안전하게 된 뒤에, 그녀는 정탐꾼들과 협상을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증거는, 5절을 보면 그녀는 여리고 왕이 보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탐꾼들은 그녀의 집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집에 머물고 있는데도 거짓말을 합니다. 성문을 닫을 때쯤 이미 그들은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따라 가면 충분히 그들을 잡을 수 있다고까지 말해 줍니다. 분명 거짓말입니다.

 

이런 정황들로 보면 그녀는 분명 자발적인 마음의 결정이 먼저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의 왕의 명령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자신의 거짓말이 발각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도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닥친 상황을 현실적으로 고려해보면, 라합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쪽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적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 속에서 생기는 두려움을 이기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두 가지).

 

첫째, 그녀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는 말에서 증명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0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분명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을 모두 들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듣고 온전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확한 지식은 바른 믿음을 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어렴풋이 알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희미하게 노출시키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분명히 어떤 분인가를 잘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직접 보여주십니다. 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주관하는 분임을 알립니다. 그리고 가장 확실히 하나님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음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죄로 죽어야 할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신이 있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한 분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생생히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나는 못 믿겠다고 쉽게 단정하는 말은 정말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드러내 주신 모든 것을 듣고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더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한 가지를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맞이하는 죽음도 의미하지만, 세상 종말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시작하신 분이 마치게 할 것입니다. 그 날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 날은 더 이상의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할 충분한 시간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세상의 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도가 갖는 마지막 날에 대한 정확한 지식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생 라합이 자신이 섬기던 세상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믿고 순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에는,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반대로 두려움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두 가지 두려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두려움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현실을 바라보며 내 자신이 스스로 만든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과,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보고 갖는 두려움은 오히려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돕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라합을 보기 바랍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 생활을 거쳐 요단 건너 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행한 위대한 일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요단 동편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다고 합니다( 21:21, 33). 이어 11절은 두 전쟁 이야기를 듣고 여리고 성 사람들의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도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이 두려움 때문에 자신은 정탐꾼들을 선대했다고 12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이 전혀 상대할 수 없는 나라들을 박살내고, 최종적으로는 자신들의 땅을 향해 진격해 오는 신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9절에 의하면 그 신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 이미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들이 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요단 저편의 두 왕은 자신들보다 앞서 하나님을 막아선 왕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세상 왕들이 패했다면, 자신이 사는 여리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10절은 전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씨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린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매우 잔인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본문의 메시지가 우리들에게 들려옵니다. 이미 진멸이 선언된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좋은 소리입니다.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예가 바로 라합과 가족들입니다.

 

그러나 요단 저편에서 죽어갔던 두 왕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누구에게 순종해야 할까요? 비록 천한 여인으로 살았지만, 이미 이 여인의 마음에는 답이 나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공부해서 아는 것도 사실 아닙니다. 누구나 그냥 들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듣고 마음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저의 경우는, 복음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이 대신 죽어야 합니까? 나는 그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알고, 너무나 사랑했기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면 너무 황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놀랐습니다. 이보다 더 큰 감동을 받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누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전부 자신의 죄는 숨기려 합니다. 그리고 남의 잘못은 손가락질 합니다. 그리고 벌 받아야 한다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예수만이 내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이 소리 듣고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내 죄가 죽어야 할 만큼 크다는 것을 깨닫지 않습니까? 예수는 내가 받아야 할 심판과 멸망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은 이 감동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너무 가슴이 벅찹니다.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두려움이 더 하나님을 믿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이라는 그 두려움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멸시 당하고 천대받던 한 여인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들고,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순종했을 때 죽음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복음이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