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1): 두려움을 이기면 쉽습니다 

1:1-9

 


지난 주까지 성막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뜰에서 참 예배와 예배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성막은 우리들에게 죄를 회개하며, 피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성막에서 나와 세상에 사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에게 힘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오늘은 한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순종을 배우는 이유는 세상에서 늘 승리하는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순종하기 힘든 상황에도 순종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있는데요. 우리 성도님들도 누군지 감이 올텐데요. ,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먼저 순종을 배우려면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을 우선으로 찾아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거나 또는 죄를 짓는 등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알려주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1절을 보면 모세가 죽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대단한 두려움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이끌며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기적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이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위대한 지도자를 대신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것이 가장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수종자였던 여호수아도 이제 50을 넘어 60이 가까워 오는 나이일 것입니다. 정탐꾼에서부터 시작해서 목숨을 내 놓고 전장 터를 누비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지만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도 모세의 죽음 앞에 죽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6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7절에서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는 말씀이 그의 심적 상태를 대변해 줍니다. 그는 전쟁을 경험했던 장수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변 적들이 모세가 죽은 사실을 들으면 이스라엘을 기습이라도 하면 어떨까 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가나안 정복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지금까지는 가나안 저쪽 편에서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정탐꾼으로 가서 목격했던 가나안의 강한 성벽과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훈련도 안 되어 있고 무기도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다가 올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살아 돌아 왔지만 지금부터는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도 생깁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떨림은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하는 좋은 구실도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부르실 때를 보면 그들 역시 두려움 때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1:8)나 에스겔( 3:6) 선지자를 부르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워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들이 직면했던 현실에서 이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한편, 여호수아에게는 순종할 수 없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홍해를 가르는 능력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나이도 있고, 자라는 아이들 아빠로서 좀 챙겨야 할 때입니다. 핑계도 있습니다. 모세를 대신해서 전장에만 나갔던 사람이기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있습니다.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고 싶음 마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여호수아에게 부담이 되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압박감으로 자기에게 주어지는 직책을 사양 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더 이상은 못한다고 핑계할 수도 있습니다. 전장에 나가 싸우는 장군이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될 수 있냐고 거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핑계, 사양과 거부, 거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하나님께는 불순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은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힘든 일은 안 한다면 진정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런 모든 것을 뒤로하고 순종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내면 속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1절을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첫 번째 비결은 책임감과 함께 더불어 그 책임감을 사명감으로 바꾸는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다음에 누가 이 백성을 이끌 것인가? 모세의 수종자로 소개되지만 이 의미는 후계자란 의미도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 여호수아는 자신이 최소한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아닐지라도, 적들과 싸워야 하는 장군으로서의 책임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책임감은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실 책임감이 어느 정도 있어야 현실이 우리에게 부담으로 주는 것들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도전을 드립니다. 목장지기들이 일년을 마치면 그들이 맡은 섬김의 자리를 내가 메울 수 있어야 된다는 책임감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주신 자녀들을 믿음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감을 가지는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들에 대해 조금 덜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책임은 의무감을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사명감입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부담 있는 부르심에 대한 동의를 의미 합니다. 사명은 의무감보다 자발적인 나섬입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을 하고 난 뒤 광야에서 적들과 싸웠습니다. 그때는 율법에 따라 20세 이상은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가족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제는 모세가 죽고 난 뒤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책임이 그에게 주어질 때 그 책임을 이제는 사명으로 받아 들이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사명감으로 무장된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해 온 순종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어떤 책임을 주시든지 사명으로 감당해 나가는 교회와 가정 개인들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2절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듭니다.군인들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령으로 주어지기에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포탄이 떨어지는 적진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당부나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장차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갈 터전을 차지하라는 명령입니다. 400년 전에 이미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입니다. 그들 조상 이삭 야곱이 살았던 땅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가지 못했던 땅입니다. 이제 노예에서 벗어났으니 자유인으로 살라는 명령입니다.

 

자유인은 자유를 누리며 살 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일입니다. 400년을 노예로 산 사람들이 더 이상 노예로 살 수 없습니다. 40년 동안 방랑자였던 그들이 더 이상 떠돌이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씨를 뿌리고 양식을 얻어 자녀들을 길러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방 신들을 몰아내고 하나님만 섬기고 말씀만을 따르는 나라를 그 땅에 건설해야 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 복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나누어야 할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에 우리보다 더 지혜롭고, 멀리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피조물에 대한 갑질이 아닙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이 허락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주실 복에 대한 강조이며 복 주실 분의 능력이며 확신입니다.

 

누가 인간에게 명령을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창조주 하나님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 사함의 십자가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구원이 허락되고 영원한 복인 영생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은 결코 거부하거나 거절해서는 안될 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4-5절을 보기 바랍니다.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스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마지막 방법은 하나님이 허락 하신 약속을 붙잡고 복을 바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은 미래입니다. 축복입니다. 소망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 던지는 미끼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꿈인 약속을 먼저 심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물을 주시고 자라에 하십니다.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사실 약속의 결과는 전부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약속과 복은 어쩌면 같은 것입니다. 약속은 그 결과인 복을 미리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믿고 복을 기대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아멘이신지요? 이것은 절대로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복 받기 위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을 붙잡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만 받기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을 붙잡는 복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응답의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체험을 위해서는 8절 상반부처럼 말씀이 먼저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도 명령입니다. 그리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한다는 의미는 항상 중얼거린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자신에게 늘 들리게 하여 그 말씀이 내 생각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8절 하반부를 보면 그 응답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길이 평탄하여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은 우리가 형통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놀라운 약속의 체험을 직접 누린 사람이 바로 창세기에 언급된 요셉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정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은 참 힘이 듭니다그 원인 중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는 두려움의 피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강하고 담대 하라고까지 명령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내 배짱으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내가 선 곳에서 내게 준 책임과 함께 사명감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나가 싸워야 합니다. 말씀이 떠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가는 곳마다 형통케 되는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