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10): 물두멍 

30:18-21

 


드디어 성막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금껏 살펴 보았던 성막에 대해 전체적으로 한번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우선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지성소 안을 들어가면 궤를 보게 됩니다. 그 속에는 십계명이 들어있어 언약궤라고도 불렀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는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한편, 십계명은 죄는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궤는 열려 있지 않고 속죄소라는 덮개로 덮여 있습니다. 이 의미는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시지만, 심판보다는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지성소가 보여주는 예배의 의미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은 느끼게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 되는 구원의 감격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포가 찬양과 말씀을 통해 들려지고 선포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다음으로 성소 안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3가지 기구가 있습니다. 첫째, 성도의 기도를 의미하는 분향단이 지성소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대화하는 수단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성소 안에는 매일 먹어야 하는 영의 양식인 떡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성소 안에는 등잔이 있습니다. 밝게 비추는 등잔은 우리를 향하신 명확한 하나님의 뜻(비전, 소명)을 의미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직도 알지 못했다면 기도(대화)해야 합니다. 기도 가운데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때 들려진 음성이 하나님의 것인지를 확인하는 수단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은 우리 가운데 내재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줍니다. 성령을 통해 들려진 음성은 반드시 쓰여진 말씀으로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거짓 영들이 우리 귀에 들려주는 것들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성막을 사방으로 둘러 치는 휘장을 보았습니다. 이 하얀 세마포 울타리는 외부로부터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 주는 일차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이 휘장은 경계를 의미합니다. 비록 성도가 세상에서 살지만 반드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려 주었습니다.   

 

구별된 삶은 성경적 세계관을 갖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움이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하나님 말씀은 진리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지켜지는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또 예배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썩어져 가는 세상을 유지하는 소금이 만들어지는 귀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이제 성막의 뜰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제물들을 모두 불에 태우는 번제단입니다. 이것은 나만이 아는 은밀한 죄에서부터 용서 받지 못할 죄까지 어떤 죄도 피로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십자가의 주님의 보혈만이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다는 고백이 터져 나야만 합니다.

 

6:23절은 죄의 결과는(삯은) 사망이라고 선포합니다. 죄로 죽은 것은 다시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죄를 이기고 사망을 정복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사건이야말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나에게서 반복되는 죄도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할 때 용서받고 치유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허락하십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죄도 용서하십니다. 회개 없는 삶은 내 고집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교만한 태도입니다. 지금 우리는 회개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회개를 상실했습니다.

 

사탄은 회개하면 세상에서 누렸던 즐거움이 다 사라질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번제단의 타는 불은 추악한 죄가 소멸되는 최고의 즐거움을 맛보게 합니다. 죄를 해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번제단이 주는 예배의 즐거움입니다.

 

오늘은 성막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뜰 안에 있는 번제단 외에 남은 마지막 기구인 물두멍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놋으로 만들어졌고 18절에 의하면 받침대가 있는 일종의 큰 대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넓적한 물통으로 번역). 여기에 물을 채워 회막과 번제단 사이에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19절은 제사장들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한 용도였음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가기 전에 번제를 드릴 때 손이나 몸에 묻은 짐승의 피나 기타 오물을 이곳에서 깨끗이 씻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도 손과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어느 곳에도 더 자세히 크기와 모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막 기구 중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기구임에 틀림없습니다. 근동지역은 모래와 바람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제사에 나아가는 제사장들은 반드시 물로 손과 발을 씻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단기선교로 다녀오는 과테말라 열대우림 지역에 가면 Tikal(띠갈)이라는 고대 피라미드 유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야인들이 남겼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왕궁과 함께 70m가 넘는 여러 피라미드를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저에게 한 장소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들 역시 신에게 제물을 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인간을 바칠 때 먼저 깨끗하게 하는 순서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들이 하는 방법은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방에 가두고 땀을 내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성막에서도 제사장들은 성물을 직접 다루기 때문에 몸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하나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만약 이런 절차를 무시할 경우제사장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정결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과 발을 씻는 이 명령은 당시 제사장들에게는 엄청 무시무시한 것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늘날에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일어나는 죽음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또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 주느냐는 것입니다.

 

1)가장 먼저 두려움은 물론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막에 실제로 임재 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방의 어느 신도 할 수 없는 일이 그들 앞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신이 이런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 가운데 죽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죽어 나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는 왜 죽이지 않으실까요? 안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여기에 지금 있지 않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여기에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죽이기보다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해 우리는 힘을 다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손과 발을 반드시 씻어야 하는 이런 구약의 제사 규례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늘 마음과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손과 발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나의 죄를 의미합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멈추어야겠다는 결단이 생길 것입니다.

 

4:24절의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신비한 조명이 비춰지고 고상한 음악이 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여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으로 존재하시기에 피로 죄가 씻어나간 거룩해진 곳에만 임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임재를 내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먼저 주님의 보혈로 내 죄가 씻음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하나님의 임재를 예배 가운데서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은혜가 없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두멍 앞에서 손과 발을 씻는 제사장들의 행위에서 한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 보혈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성도일지라도, 실제 삶에서 죄짓는 행위를 멈추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엄청난 범죄가 아니라도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 시간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성도의 간증을 들으면 은혜보다는 은근히 시기가 생깁니다. 하나님! ‘나도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참밥으로 만드십니까?’ 원망이 나옵니다. 또 어느 날 예수 안 믿는 친구, 남편, 아내, 아버지, 어머니, 동생, 친구, 직장 동료와 같이 왔는데 그날 따라 예배 시간은 왜 그리긴지요.

 

목사님은 설교 좀 깔끔하게 마치면 한 영혼 구원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런데 광고, 특송, 성찬식에 세례식 있고, 마지막으로 파송식까지 겹치면 정말 짜증나고 화까지 납니다. 이런 내 모습과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때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기 싶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는 거듭난 성도의 삶에서 실제로 범죄하고 있는 죄는 물론 예배의 현장에서조차 마음으로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도 완전히 멈추고 온전히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십시오. 우리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간구하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만을 원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도록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지금 드려지고 있는 예배에만 집중해 보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이 물두멍은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출 38:8절은 말씀해 줍니다. 여인들의 외모를 단장하던 거울이 성막에서 제사장들의 정결을 위해 물을 담아두는 도구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성도는 외모보다 마음과 생각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어느 정도 내면상태를 나타냅니다. 말은 더 잘 표현해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컬러로 스캔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막은 우리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었습니다. 동물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해 주었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음을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분향단)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마음으로 듣고, 말씀으로(떡상) 확인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혼란한 세상에서 들리는 많은 소리를 구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살아 가는 존재 이유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한 자만이 진정한 예배자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도 정말 멈추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