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8): 뜰 

27:9-19

 


성막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제 전체 구조를 한번 간단히 살펴 볼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PPT1).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뜰을 만나게 됩니다. 다음으로 성소를 지나고 마지막으로 지성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예배자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비록 예배 때 사람들이 함께 모이지만, 그곳에 모인 회중들 각 개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예배당에 있다고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내가 주님을 만나야 예배인 것입니다. 만난다는 뜻은 나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어떤 사람은 은혜 가운데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는 철저히 한 사람을 부르시고, 만나 주시고, 대화가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내가 듣기 원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은혜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에게 힘들고 아픈 말씀들이 나의 양심과 영혼을 찌를 때, 얼마나 믿음으로 반응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나에게 들려지는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찔림이 있으면 아멘으로 응답해 보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자랄 줄 확신합니다. 저의 신앙이 자란 비결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다시 성막으로 돌아가, 출애굽기를 보면 성막 기구에 대해서 가장 먼저 지성소 안의 것을 언급합니다. 지성소 안에는 십계명을 넣어둔 상자인 궤 하나만 두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주어지는 것은 심판임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궤를 그대로 열어두지 않고 ‘속죄소’라 불리는 덮개로 덮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 기억이 나는지요? 심판보다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 보혈로 죄 용서함 받고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는 지성소의 삶이 예배 가운데 반드시 있을 줄 믿습니다. 

 

지성소 다음으로 성소를 살펴 보았습니다. 성소 안에는 3개의 성전 기구가 놓여 있습니다. 지성소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향을 피우는 분향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고 등잔과 떡상이 있습니다. 분향단은 우리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등잔은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떡상은 매일 먹는 영의 양식인 말씀입니다. 

 

성소 안의 3 가지 기구들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은 기도하며 음성이 들려올 때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말씀으로 확인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떡상과 등잔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결국 순종해야만 하는 과제입니다. 하나님 뜻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합니다. 선택적 순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순종할 수 있는 무조건적 순종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성경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고후 12:8절에 의하면 먼저 그는 자신에게서 그것이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간구합니다. 그러나 9절 상반부를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응답을 듣게 됩니다.

 

자신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전도 사역에 대단한 지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인해 사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위대한 일을 이루어내었습니다. 가능하였던 것은 순종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순종은 능력을 부릅니다).

 

고후 12:9 하반절을 보면,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만약 바울 사도가 기도 가운데 들려지는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위대한 또 다른 사도를 기다려야만 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이미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응답을 들으면, 반드시 말씀으로 확인하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소의 삶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마지막은 성막 뜰에서의 성도의 삶입니다. 뜰에는 어떤 성전기구가 있느냐는 다음 주부터 살펴 볼 것입니다. 오늘은 뜰 그 자체를 한 번 보려고 합니다(PPT2). 오늘 읽은 본문 전체를 보면 성막을 빙 둘러가며 동쪽 부분도 입구인 문만(청색, 자색, 홍색 그리고 베 실로 짠 휘장) 제외하고 모두 세마포로 울타리를 치게 됩니다.  

 

먼저 성막 뜰의 세마포 울타리는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구분하는 경계의 의미입니다. 이 구분은 세상의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은 결코 짝할 수 없다는 단호함을 또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신앙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로 하여금 이중적인 삶을 살라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 원리와 가치관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하려는 태도를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또 그것을 너머 목숨까지도 걸고 반드시 지킬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세상과 충돌하고 저항하며 피까지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세상과 타협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를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바로 14절에서 성막의 문입니다. 다른 복잡한 구조는 생략합니다. 특이하게 성막의 문은 유일하게 ‘하나’ 라는 사실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또 다른 구원관이 있다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뿐이라는 기독교의 구원관은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배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독선적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전도에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폭력은 폭력만 나을 뿐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군대를 길러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선포하며 그들의 고백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인격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앞에서 구름과 불로 산을 덮고 땅을 흔들며 한 마디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들 겁이나 하나님만 믿겠다고 난리 날 것입니다. 세상 복음화는 이렇게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전도나 선교팀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천국은 정원 미달, 지옥에는 인원 초과를 이룰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믿으라고 했다면 그것은 폭력이고 억압이며 강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정당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그렇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타락도 강요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하도록 프로그램화 된 로봇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스스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역시 자신들의 의지를 가지고 믿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것을 ‘공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공의를 세상에서 인간이 적용하는 것을 ‘정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어느 누구도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늘 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만이 진정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십자가 대속만이 영생을 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구원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예수 대신 어떤 특정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구원자라고 속이는 ‘그 사람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다른 한가지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 대신, 착한 일을 해야만이 자신들이 제시하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전쟁에 개입하거나 폭력을 사용할 때 실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선호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를 믿어도 죄짓는 모습이 여전히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교인들에게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분명 호기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렇게 믿을 바에는 바르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내가 더 낫고 너는 못하다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없는 시간에 영원한 생명이냐 아닌가를 다루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만큼은 하나님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인간들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인간들이 엉망으로 다스리며 파괴해도 용서하고 심지어 내버려 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무관심하게 뒤로 물러 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번 더 주어지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고 난 뒤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았을 때 이미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급박한 것입니다. 인간은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는 영역이 많다는 것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인간의 행위 이면에 담긴 사람의 악한 의도와 생각과 계획을 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한 번씩 잘하는 선한 행위를 보고 착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또 착한 일을 늘 해 왔다고 해도, 만약 그 사람이 폭력배의 보스라면, 자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죄가 없을까요? 심지어 태어나서 한번도 나쁜 일을 해 본 일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요? 또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그 선한 일이 자신이 행한 악한 일을 다 상쇄시킬 수 있을까요?

 

행위로 하는 악행들을 다 제쳐두고 마음으로 짓는 죄들은 또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죄가 가장 큰 죄라면 누가 이 심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배하지 않는 것 역시 엄청난 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성막을 둘러싼 세마포 울타리를 보면서 또 다른

한 가지 결론은 예배하는 성도를 보호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18절에서 언급된 울타리의 높이에서 느껴집니다. 세마포 휘장의 높이가 다섯 규빗(1규빗: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의 길이인 45.6cm)으로 2.28m 정도가 됩니다.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높게 설치됩니다. 그렇다고 비밀스럽게 드려지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자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세상 것을 차단시켜 줍니다. 예배에 집중하게 하고 예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은 세상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성막 울타리는 예배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밖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거짓입니다. 또한 예배는 슬쩍 넘보며 드릴 수 없습니다. 주일날 내 일 하면서 설교만 듣는 것 예배 아닙니다. 형식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형식은 마음을 담습니다. 또 마음은 형식을 지켜 나갑니다. 경건한 예배는 형식과 마음이 함께 가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먼저 성막의 울타리는 세상과 구분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로 성막 울타리는 보호를 의미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건한 예배자로 살도록 죄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이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게 만들어 세상과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나라를 계속 확장시키기 위해 교회가 가진 거룩의 울타리를 자꾸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타종교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구원관을 존중하고 성경이 죄라고 지적하는 것들에 대해 너무 강조하지 말 것을 은근히 강요합니다.

 

성도는 자기를 지키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거룩한 예배자는 비록 나의 죄가 드러날지라도, 죄는 죄라고 분명히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용기가 있어야 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호받는 경건한 예배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