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7): 널판
  

26:15-30

 


성막을 살피고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곳이며, 그들과 만나는 장소요, 그리고 제사 드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막을 하나의 집으로 생각한다면 지난 주에는 성막의 지붕 격인 4 겹의 덮개를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성막 벽에(골격) 해당되는 널판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막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간단합니다. 먼저 여러 개의 널판들을 연결해서 세우고 덮개를 덮으면 완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보게 될 이 널판들은 영적 의미로 볼 때 교회를 이루는 각각의 성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으로 굳게 세워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널판 하나의 길이는 4.5m 너비 67.5cm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쪽에 20(18), 북쪽에 20(20) 그리고 성막 뒤 서쪽에 6(22)와 서쪽 뒤 두 모퉁이에 두 개를(23) 합쳐 48개를 연결하여 성막이라고 말하는 성소와 지성소의 골격을 만들게 됩니다.

 

고대근동의 신전들을 살펴보면 동족을 향해 입구가 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해가 뜨는 동편을 정면으로 바라본 상태에서 방위의 기준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쪽은 뒤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쪽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이 되고 북은 왼쪽이 되는 것입니다.  

 

너비가 67.5cm 인 널판이 20개씩 남과 북으로 각각 나란히 세워져 성막의 전체 세로 길이가 13.5m 정도 됩니다. 그리고 가로 폭은 성막 뒤쪽인 서쪽에 67.5cm 널판이 6개이므로 4.05m 정도가 되겠지요. 남과 북으로 나란히 그리고 뒤쪽 서쪽에 널판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동쪽은 입구로 널판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성막의 전체 모양을 상상해 보면 () 디귿자 모양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널판지들을 어떻게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모래를 파서 묻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널판을 똑 바로 세우는데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17절을 보면 널판을 바로 세우기 위해 두 촉을 만들었습니다. 이 촉이 널판의 어떤 부분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NIV ‘projection(돌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촉꽂이로 번역해 요철 부분이 있음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은 원어적으로는 사람의 신체 기관인 을 의미합니다. 사람 손처럼 서로 단단히 붙잡아 주어서 사막의 강한 바람을 견디어 낼 수 있게 제작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힘들고 어려운 강한 폭풍과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 넘어지지 않게 서로 지탱하게 하는 촉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야 할 두 촉은 바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실제적 손길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넘어 어려운 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펴서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구제와 봉사의 목적이 담긴 선교헌금을 매월 마지막 주일에 합니다. 세계 각처에서 사고와 재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돕기 위함입니다.

 

물론 우리 공동체 내에서도 서로 도움의 손길을 주기 위해 소그룹으로 목장을 편성하여 운영하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예상치 않던 문제들을 만날 때 서로 돕고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힘들고 우울할 때 서로 위로하고 손을 잡아주면, 조금 더 수월하게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힘입니다.

 

특별히 아프거나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또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믿음의 공동체는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요청의 손을 내 밀기를 꺼려하지 말기바랍니다. 이런 저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바랍니다. 어려운 형편이 있다고 말하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을 도와 줄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어떤 분이든지 힘든 일이 생기면 직접이든 누구를 통해서든 알려주면, 함께 기도하고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 요청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도움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제때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자비라고 부릅니다.

 

우리 코넬한인교회가 자비가 넘쳐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하기 조차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볼 수 있는 것은 관심에서 나옵니다. 또 저런 처지라면 참 힘들겠다라는 공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는 이민자들입니다. 또 먼 곳에 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도 있습니다.

 

이런 같은 공감대가 있으면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 챙겨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챙길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받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가을 새 학기에 당장 우리들에게 예배당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준 Trinity Lutheran Church에 감사를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들어오는 입구에 감사카드를 보셨을 것입니다.  

 

각자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자발적으로 감사의 글이나 그림으로 채워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다음 주 정도에는 꽃과 함께 미국 교회에 전달하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성도들을 향해 늘 관심과 실제적 도움이라는 이 두 촉을 잃어버리지 않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널판을 잘 고정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19절에서 소개된 은 받침입니다. 받침은 널판 아래쪽에 붙어 있을 두 개의 촉을 꽂을 수 있도록 홈이 파져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KJV는 이것을 끼우는 구멍(socket)’으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 받침은 다른 성전의 기구들과는 달리 금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특별히 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30:12, 1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생명의 속전을 드리도록 명령합니다. 드려진 것으로 은 받침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은 받침은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렸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을 때에만 든든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은 받침이 없으면 널판이 바로 세워질 수 없듯이, 성도 역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셨다는 이 믿음 위에 서 있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심판 때 타는 불 속에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담지 않은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예수만이 우리 인간의 구원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의 속죄의 피가 아닌 다른 인간적인 선행이나 의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세뇌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에 우리는 구원 얻을 만한 어떤 선이나 의를 행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모두가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다 죄인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헛된 망상입니다. 3:24절에 성도는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의 은혜인 것입니다.

 

널판이 은 받침 위에 놓여 있듯이, 우리 성도의 구원도 주님의 보혈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고백은 주님 올 때까지 견고해야 합니다. 다가올 핍박과 박해라는 세찬 바람에도 성도는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널판을 세우는데 받침이 없다면 사막에서 불어오는 세찬 모래 바람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복음의 진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엡 6: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라고 명령합니다.

 

진리 되는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성경을 알고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교묘한 술책까지도 꾀 뚫어 볼 수 있고, 세상의 온갖 이단들이 헛소리 할 때,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방어만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널판이 땅 위에 놓여있긴 하지만 은 받침대 위에 단단히 고장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땅 위에 살아가지만 땅 위에 설치된 은받침 위에 고정되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땅 위에 있지만 결코 땅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역시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과 구별된 세계관과 실제 삶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원칙들은 이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좋은 말이 도움도 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 붙잡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좋은 말들이나 가치관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세워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설 때 세상의 좋은 것들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이 지금 엉망이 되고 방향을 잃었다면, 말씀 위에 지금 내가 서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반복되는 죄의 신발을 벗기시고, ‘의 새 옷을 다시 입히시고, 가락지를 끼어주시며 내 자녀가 맞다고 선포해주시는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령님은 그런 분들을 돕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손 한 번 붙잡아 보시기를 도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널판을 든든히 세워주는 장치는 바로 26절에서 언급되는 입니다. 이것은 나무로 만든 빗장을 말합니다. 널판은 따로따로 세워지지만 그 모든 널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바로 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의 띠가 교회를 하나되게 만듭니다. 점점 마지막 대가 가까이 오면, 세상은 사랑이 식어갑니다. 세상에서 사랑이 이미 왜곡 된지 오래입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육체적 본능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사랑이 아닌 서로의 필요만을 채워만 가는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아픔을 싸매어주고, 위로하고, 치유해 주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만드는 관계로 변해갑니다. 성도는 이런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쳐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에 기초한 사랑으로 회복 되야 합니다. 나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의 사랑을 세상에 심기 위해 파송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빛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맛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나는 여전히 그 맛과 빛을 간직하고 있는 성도인지요?

 

잃어버렸다면 주께로 돌아가 회개하고 말씀으로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먼저 나 자신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남의 허물까지도 품어주는 사람인가? 내 일이 잘 안되고 짜증나면 남에게 화를 풀며 남을 괴롭히는가? 상처를 남기는 이기적인 사람인지요?

 

그렇다면, 주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 가운데 갇혀 버립니다.

 

다시 반복되는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죄가 죄인지 모르고 내가 죽어가고 있는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술수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나의 약함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수치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벌겨 벗겨지는 수치까지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잘못을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감싸 안으셨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 죄를 다 자신이 감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을 저 타는 지옥 불 속에 던져 넣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며 하나님 사랑만 볼 것이 아니라 심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의 고통을 너무 잘 알기에, 주님은 보혈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가 주의 사랑을 모른체해서는 안됩니다. 저의 소원은 주님의 사랑 나노(nano) 분의 일만큼이라도 갚고 죽었으면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산 하나님의 사람들을 힘든 자리에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분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치유를 하는 곳이 또한 교회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죄임을 깨닫게 하고, 성령이 역사하여 그들도 거듭나도록, 예수를 제대로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았을 때 사회는 물론 국가도 변했습니다. 15세기 유럽의 포루투칼에서 시작된 노예무역은 전 유럽을 휩쓸게 됩니다. 그러다 19세기에 들어서서 영국에서 기독교 정치가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에 의해 노예제도 폐지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1833년에 대영제국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와서 짐승처럼 대하였던 기독교였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보고 깨닫는 시간은 300 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의 죄를 발견한다 해도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예가 되겠지요. 정말 변하기 힘든 것이 바로 죄 앞에 선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내 삶에 기초가 될 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말씀에 절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이 은혜 때문에 우리들의 단단한 마음과 죄에 찌든 삶은 녹아 내리기 시작합니다. 죄를 발견한다면 말씀 붙잡고 주 앞에서 변화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성막은 널판이 받침대에 바로 고정될 때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널판은 세상 한 가운데서 바로 서야 할 성도입니다. 성도는 말씀에 기초하여 살 때, 어떤 시련과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우리의 관심과 손길로 폭풍우 치는 세상에서, 서로를 붙잡아 주고,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