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6): 휘장  

26:1-14

 


지난 주부터 대면 예배가 시작 되었습니다. 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비대면 예배에 우리가 그 동안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다시 편한 상태로 돌아가려면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긴 기독교 역사르 보면 예배는 믿는 성도들의 신앙생활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성도가 예배 드리는 것을 방해하고 막은 적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마시대 초대교회에 대한 박해입니다. 성도들은 낮에 모일 수 없어 밤에 모이다 보니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성찬식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피를 먹는 사람들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보고 아이를 잡아먹는 식인종으로 불리기도 했구요. 지상에서 예배를 더 이상 드릴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지하로 내려가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 장소를 우리는 카타콤이라 부릅니다.

 

라틴어의 ‘cata의 가운데라는 말과 tumbas라는 무덤들이라는 의미가합쳐저 무덤들 가운데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을 묻기 위한 무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예배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장소이든 예배를 위한 장소로 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어떤 힘든 시간에도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오는 세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시대가 오고, 박해자가 나타날지라도 예배는 멈추지 않습니다. 중단시킬 수도 없습니다. 예배는 그런 것입니다. 예배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막을 덮는 4개의 휘장이 언급됩니다. 휘장이나 영어번역의 Curtain 보다는 덮개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안쪽에서 바깥 쪽으로 덮는 순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덮개는 성막을 덮어 추위와 더위 바람과 모래를 막아주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제사가 방해 받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고 난 뒤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백성들 가운데 짓게 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만남이 어떤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이루어지기 위함입니다. 덮개는 그 역할을 한 몫 한 것이지요

 

먼저 26:1절은 성막 제일 안쪽에 놓이게 되는 덮개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성막 내부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베실 청색 자색 홍색의 화려한 실로 길이는 12.6m, 폭은 18m로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는 그룹(천사)모양을 수놓았습니다. 그룹들을 볼 때 하나님이 늘 자신들과 함께 하며 돕는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배 드리는 가운데 성령은 함께하며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고, 말씀에 집중토록 돕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배 시간에 앉으면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여태 생각나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몰려 오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집중하지 못할 때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마음과 정성과 온 힘을 다해 찬양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입술에서 회개가 터져 나오게 만듭니다. 내 마음을 옥토 밭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성도님들에게 하나 부탁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배 전 한 주를 돌아보며 회개의 시간을 꼭 갖기를 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씨앗이 던져질 내 마음 밭을 일구는 것입니다. 걱정과 분노의 돌들을 들어내야 합니다. 불신과 미움의 가시가 나를 해롭게 하지 않도록 제거해야 합니다. 말씀을 먹을 준비가 되면 될수록 은혜가 더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입구에서 받은 주보를 보고 오늘 주실 말씀을 내 손으로 직접 찾아서 먼저 읽어보기 바랍니다. 스크린에서 말씀이 보여지긴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분들은, 말씀을 들을 때 훨씬 이해가 잘 됩니다. 그리고 좋은 씨가 내 마음 밭에 던져지면 아멘으로 받기를 소망합니다

 

아멘에 대해 잠시 나누고 가려고 합니다. 아멘은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 밭에 떨어진 알곡이 껍질을 터뜨리고 싹이 나오는 순간이라 저는 믿습니다.

 

씨에 싹이 나지 않으면 자라지 않습니다. 싹이 나지 않은 체 땅속에 있으면 결국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서 좋은 열매를 원하면, 입술로든 마음속으로든 아멘으로 응답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은 믿음의 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달 정도 했을 때와 안 했을 때 변화를 꼭 비교를 해 보기를 도전 드립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 기간 동안 집에서 몇 가지 씨를 뿌려 키워 보았습니다. 뿌린 씨가 싹이 나면 씨 모양과는 전혀 다르게 자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깨달음이었는데요. 이것을 우리 일상의 삶과 한 번 연결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삶은 우리를 지치고 힘들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아멘으로 반응하며 믿음의 싹이 나기 시작하면 삶은 확 달라집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울한 마음, 상한 마음은 다 사라지고 즐겁고 활기에 찬 삶이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 두 번째 덮개가 출 26: 7절에서 언급됩니다. 전체 크기는 길이 13.5미터, 너비 19.8 미터로 처음 것을 충분히 덮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하나님의 확장되는 은혜처럼 다가옵니다. 이것은 염소 털로 만들어 집니다. 방습과 보온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목민들의 천막 재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비록 첫 번째에 비해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염소는 인간의 죄를 담당하는 희생제사 제물로 사용 됩니다. 특별히 레 16:8-10절을 보면 대 속죄일에 염소 두 마리를 잡게 됩니다. 하나는 제단에 희생제물로 드려집니다. 또 다른 한 마리는 백성들의 죄를 전가시켜 광야로 보내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예수의 보혈이 없이는 죄 용서함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흘린 주님의 피는 율법이 나를 죄인이라 정죄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배 가운데는 죄 용서함을 맛보는 것입니다. 죄에서 정죄함을 받던 사람이 예배 가운데 선포되는 복음 앞에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한 심령 위에만 그리스도의 보혈이 덮여질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 때 그 기쁨을 찬양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도 회개에서 출발하여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섞어지고 부패하게 만드는 죄로부터 나를 살리고 보호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죄 용서함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막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덮개를 동시에 보면서 놀라운 의미를 하나 더 발견해 보려고 합니다

 

성막 안쪽의 첫 덮개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도의 아름다운 형상인 를 나타냅니다. ‘죄가 씻겨진 의인된 모습인 것이지요. 두 번째 덮개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착한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첫 번째와 두 번째 성막의 덮개를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 드리는 우리 예배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산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살리기 위해 철학과 종교를 동원하여 장식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지 못합니다. 가장 구하기 힘든 보석을 목에 걸고 손에 들고 있을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아들의 보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이 내게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막을 덮는 덮개를 보며 피를 생각나게 하듯이, 우리 모두는 예수의 보혈을 믿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 번째 덮개는 26:14 상반절에 의하면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된 첫 번째와 염소 털로 된 두 번째 덮개를 다시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덮는 것이 아니라 팽팽하게 잡아당겨 말뚝에 고정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부터 성막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덮개는 외부 사람들의 눈에 직접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비나 폭풍 그리고 먼지 등에 노출 되어서 보잘것없이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태어날 때 왕궁에서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 53:2절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주님의 외모는 별로 출중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왕처럼 군림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들을 의인이라 칭하는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죄인이라 불리던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온 세상을 죄로부터 건질 구원자이면서도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심지어 뺨을 맞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정말 메시야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한 강도는 주님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덮개는 붉게 물들인 양의 가죽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붉은 빛은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죽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으로 26:14 하반절을 보면 마지막 네 번째 성막의 덮개는 제일 바깥을 덮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람과 비, 먼지와 더위에 직접 노출되는 부분이기에 아주 질진 해달(바다 물소, 돌고래) 가죽 중 하나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가장 바깥 덮개는 성소를 완전히 덮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있는 나머지 덮개는 물론 지성소와 성소 안도 완전히 가려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성막을 볼 때 겉으로 드러난 해달의 가죽으로 덮힌 볼품 없는 모양만 바라볼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십자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치한 것으로 취급하고 고상하고 멋진 신화에만 귀 기울이려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단지 목수의 아들로만 봅니다. 세상에 전한 하나님 나라는 좀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세상을 만들려는 수단으로만 이해합니다. 예수 안이 아닌 바깥에 서 있다면 우리도 여전히 그 차원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 안에 머물기에 십자가를 믿게 됩니다.

 

십자가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생명을 주기 위한 구원의 사건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은 은혜의 자리입니다. 허무한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삼일 만에 죽음에서 살아난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바깥 덮개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겉은 낡아지고 색도 바래집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의 삶과도 같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알 수록 가장 바깥에 서서 비바람을 맞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찬 바람과 폭풍우를 견디어 냅니다.

 

궂은 일, 험한 일, 모래 먼지를 덮어 쓰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날아오는 모든 것을 막아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돈이 있어야 구제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할 수 있을까요? 많이 알아야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랑하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장 천한 자리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줍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도 다 우리를 위해 쏟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어떤 일을 맡아도 사랑이 우선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올 가을부터 우리 교회는 캠퍼스 바깥에서 미국 교회를 빌어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다 보니 더 섬기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떤 일들을 맡게 되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사랑으로 모든 일을 자원해서 맡아주시고, 감당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그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고후 4:16 하반절을 보시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경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나의 스펙만 쌓아가는 세상사람들과는 전혀 달라야 합니다. 주 안에서 드리는 삶을 헌신 구제 봉사 선교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통해 속사람을 키워 가는 삶이 있어야만 합니다.

 

속사람이 커가는 비결은 어려울 때 주를 위해 나서는 사람입니다. 다들 힘들어할 때 남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의 외형적인 것들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다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고난 앞에 건강, 물질, 명예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그때 힘을 발휘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입니다.

  

속사람은 힘들고 어려워질 때 나를 흔들리지 않게 견고하게 해줍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믿음을 드러냅니다. 입술에 찬양을 담는 여유가 나타납니다.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이게 뻥처럼 들리는지요? 아닙니다. 성도의 능력이며 성도의 실제 삶인 것입니다.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성막의 덮개는 4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이처럼 보호받고 사랑 받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역시 어떤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드려져야 할 소중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배를 생명처럼 여기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돕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예배가 우리 가운데 이어지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