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3): 떡상    

25:23-30


 

성막에 대한 세 번째 시간입니다. 평소에 성막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막을 통해 예배자의 삶을 살펴 보는 것입니다. 새 학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때 가장 우선이 바로 주님 앞에서 드려지는 진정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는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삶이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그 어느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자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예배 가운데 죄 용서함을 체험합니다. 죄 용서함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짓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51: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 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비대면 시대의 나의 예배 생활을 보면서 주님 앞에 회개할 것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주로 예배가 있는 주일에 앞서 토요일에 나를 돌아보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를 막고 있는 죄를 회개하는 시간들이 많아지기를 도전 드립니다.

 

#1) 회개할 것은 마음도 없이 그냥 정해진 시간에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지요? 이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에서 누리는 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발적이지 못하거나 의지가 부족하면 예배 드리는 시간이 되어도, 심지어 시간이 조금 넘어가도 그 자리에 앉기가 싫습니다. 찬양을 해도 입술이 잘 안 열립니다. 설교를 들어도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부를 드리는 번제처럼 나를 기꺼이 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하기 싫으면 부모님이 억지로 시켜도 잘 안됩니다. 스스로 공부할 마음이 생기면 재미도 있고 실력도 늘고 성취감도 늘어납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나 자신이나 가정의 예배 생활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자발적인 즐거움입니다.

 

만약 상실했다면 이것이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성령님께 도와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 라는 고집 센 자아를 이기셨던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뒤로도 이미 나를 이기신 하나님께 다시 맡겨 드리는 기도를 늘 제일 처음으로 해야만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더 재미 있고 나를 즐겁게 만드는 뭔가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제거 해야만 합니다. 자녀들인 경우 대개 오락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시간으로 전환하도록 도와 주고 결단하게 해야 합니다. 꼭 그 시간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날이나 시간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지요.

 

나무라고 혼내기 보다 시편 1장 말씀을 들려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말씀 그 자체가 역사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복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역사할 것을 믿습니다.

 

#2) 회개할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자발적으로 참석하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겨우 예배에 참석은 하지만, 둘러싼 나의 환경 때문에 설교만 듣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나에게 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정립해 보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 보기를 먼저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에게는 주일이 주는 안식을 철저히 누리라고 조언해 드립니다. 휴식의 시간을 따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간 조금 남짓 되는 예배시간에 충분한 안식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강박감도 좀 줄어들고 다음날 효율도 더 오를 것입니다. 피곤한 심령이 안식을 찾는다면 그다지 손해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3) 코비드 상황이라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된 부분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이것 역시 회복 되어야 하고, 얼마든지 지혜롭게 회복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팬데믹이라는 환경에만 압도되어 주님 의지하지 못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님께 내어놓고 용기와 소망을 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4) 마지막으로, 오늘 성도님들과 나누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의 영적 건강을 잘 챙기지 않는 것을 정말로 회개해야 합니다. 시간이 돈일 정도로 모두들 바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도 우리는 건강을 위해 저녁이라도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 구입해서 먹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휴식도 하고 휴가도 가고 미술관을 찾아 문화생활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정신과 관련이 있고 정신세계에 해당되는 부분을 건강하게 만드는 활동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만 건강하면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인간이 가진 영의 영역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영의 세계를 인정한다 해도 단지 정신적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의 세계가 다루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나 사후세계나 구원 등의 본질적인 것들을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갖지 않은 사람들 보다 마음의 안정을 더 갖는다 정도로만 취급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 다른 세상 신들과 같이 평준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무당이 굿을 하면 귀신이 떠난다고 믿습니다.

 

점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만 하면 운수대통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이사도 못 가게 됩니다. 속 시원하게 말해주고 해답으로 부적도 제시합니다. 앞으로 덤벼드는 악한 기운까지도 막아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더 강한 귀신이 그에게 달라 붙는다는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막 5:9절에 보면 군대귀신 들린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한 사람에게 군대만큼 많은 수가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 귀신들은 그렇게 하는 줄 아는지요? 사탄이 귀신들의 왕임을 알리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귀신들에 대해서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귀신이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귀신이 접근도 못합니다. 아무리 강한 귀신은 물론 귀신들 대장인 사탄 역시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속에 함께 하는 성령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십자가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상반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 누구도 예외 없이 사탄의 시험 속에 빠짐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와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전 10:13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은 시험 당할 즘에 피할 길을 주시어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멋진 승리의 삶입니다. 그러면 승리하며 살고 있는지요? 문제는 현실입니다. 왜 우리는 살면서 사탄의 유혹을 감당하지 못할까요?

 

게다가 하나님이 허락한 피할 길은 왜 또 찾지 못할까요? 답부터 먼저 말한다면 예수를 믿고 구원은 얻었지만 삶에서 영적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영적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면 영양 부족으로 시험이 오면 쉽게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영양실조가 더 심해지면 눈도 잘 안 보여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피할 길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정도에서 멈추었다면 훌륭한 스승은 못 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친절하게 우리가 만나게 될 시험까지도 이기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말씀으로 시험을 이겨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사탄의 밥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의 영을 살찌게 하는 영의 양식인 말씀을 매일 먹어야 합니다. 먹는 방법은 정기적으로 성경을 통으로 읽고 내게 갈급함을 채워준 생명이 되는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8명의 암송 팀이 지난 주에 방학 동안 암송을 마무리를 했습니다. 새 학기에 곧 시작될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확실하게 말씀이 나에게 다가 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를 시험 들게 하는 순간들이 정말 눈에 보이게 줄어 들었습니다.  

 

화 날 일이 생기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먼저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일단 화내는 일이생겼는데 말씀이 내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냥 해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글을 읽는 아이들에서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암송하는 방법과 그다지 많지 않는 성경 구절들을 소개할 것입니다. 분명히 한 가지는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식탁이나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말씀 외는 소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자녀들과 가족 모두에게 혁명을 가져다 올 것을 믿습니다.

 

참 놀랍고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도 하나님 말씀을 매일 먹어야 산다는 진리를 깨닫게 만드셨습니다. 다시 성막으로 돌아와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막은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성소 안을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소 안에는 상과 등잔대, 분향단이 비치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출25:30절에서 언급된 진설병을 두는 떡상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진설병은 lehem(레헴)이라는 떡의 의미와 panim(파님)이라는 임재라는 말을 합쳐서 ‘임재의 떡’(the bread of the Presence)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소 안에 떡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에 놓인 이 떡을 하나님이 먹을까요? 아닙니다. 이 떡을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이미지입니다. 또 이 떡은 이스라엘 12지파에게 항상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의미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상을 만들어 그 위에 떡을 올린 모습이 특별합니다. 당시 짐승 가죽을 땅에 펴고 음식을 올려 놀고 식사하던 고대 근동의 유목민들의 식습관과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25:24절에 금으로 싼 상은 그 자체만으로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떡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그분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것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 떡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의 생명을 위한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요 6: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외치셨습니다. 6:56-57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그를 취하는 자마다 영적 죽음을 면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떡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롤 예표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분이기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죽음 이후에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생명 안에 이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매일 공급하시는 영의 양식으로 우리의 생명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떡은 매일 우리가 먹어야 하는 영원한 양식입니다. 30절 하반절을 보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마시며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죽는 날까지 이것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평생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 떡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차려진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예배 시간에 우리는 이 떡을 먹고 계십니까? 먹었다면 배 부름이 있는지요? 포만감을 갖고 돌아 가는지요? 아니면 왔다가 먹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지요? 이제 남은 시간은 예배 가운데 보이지 않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배 시간은 영적 양식을 먹는 시간입니다. 우리 내면에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을 해결합니다. 굶주림은 참 다양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허무와 무의미입니다. 좋은 학교에서 공부는 하고 있지만 때로 남들과 비교하면서 무력한 나를 발견합니다. 직장을 다니지만 나의 적성에는 맞지 않아 재미라곤 없고 짜증납니다

 

또 우리 내면의 갈급함을 채우려고 하지만 잘못하면 세상이 그어 놓은 윤리 도덕 법적기준을 탈선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뉴스를 통해 보게 되는 각종 사고 사건 비행 범죄 등이 우리 인생의 굶주림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르게 채워지지 않으면 인생은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독에 시달립니다.

 

왜 이런 굶주림이 세상에서 일어날까요?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굶주림을 채워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세상에는 도덕과 윤리 법, 문화와 오락, 교양과 철학, 종교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채워 주지만 포만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임을 또 한 번 증명해 줍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인간 내면의 굶주림을 채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비워있는 영혼의 세계를 하나님의 호흡으로 채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갈급해 하는 이유는 요 6:32절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주신 참 떡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35절은 주님이 바로 그 생명의 떡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세상에서 주리지도 않고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믿는 자는 목마름이 없습니다. 시험은 우리들에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넉넉히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피할 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가 목마름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온 것입니다. 약을 먹고 수술을 해서 다시 건강을 찾기보다 늘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고 예방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롬10:17절은 말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영적 양식인 말씀이 공급되는 곳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믿음이 생기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나의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는 식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내 영혼의 목마름이 풀리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