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2): , 증거판과 속죄소  

25:10-22


 

지난 주부터 성막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는 성막의 다른 두 이름인 성소와 회막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로 성소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회막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죄가운데 있는 나를 거룩하게 하시며, 나의 삶에 관여 하신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중심 되었다는 증거들은 3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이 중심 된 사람은 사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과 관련 있습니다. 다들 사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주님이라는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거듭날 때, 내가 주인 된 것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 됨을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이 고백을 한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말씀이 나의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또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늘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우선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중심 된 삶은 나의 입술의 말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거칠고 비꼬고 비난하고, 냉소적인 말이 아닌 하나님의 언어를 입에 담게 됩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을 자제하게 됩니다. 막말은 욕설도 해당되지만, 생각 없이 하는 것도 해당됩니다. 하지만 누가 생각 없이 말하겠습니까?

 

생각 없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축복의 말보다 저주가 나오고, 칭찬 보다는 남을 깎아 내립니다. 격려보다는 비꼬는 말들입니다. 자녀들에게나 부부간에나 성도들간의 대화나 말들을 점검해 보시고 정말 하나님 중심 된 삶을 사는 성도인지 확인해 보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나의 삶에 중심 되었다는 마지막 증거는 예배에서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은 예배입니다. 성도는 늘 예배자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살펴보면 그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근원되심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의 보혈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죄 용서함을 공급받습니다. 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받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드림의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삶에 지쳐 쓰러지고 넘어져서 더 이상 의욕도 생기기 않을 때 말씀을 듣고 내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힘을 공급받습니다. 앞이 막혀 캄캄할 때 기도하면 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예배 가운데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공급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승리자가 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더 근원적인 질문으로 누가 진정한 예배자이며 어떻게 될 수 있을까입니다. 오늘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지성소 안에 있는 궤와 그 궤속에 둔 증거판과 궤의 덮개인 속죄소 세 가지를 통해 답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25:9절에서 성막을 지으라는 말씀이 있고 난 뒤 10절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은 궤입니다.

 

먼저, 궤는 광야에서 흔한 아카시아 일종의 나무로 만든 네모난 상자입니다. 조각목은 레바논에서 높이 곧게 뻗은 백향목이 아닙니다. 오히려 옹이가 많고 가늘어서 사람들에게서 천하게 여겨졌습니다. 즉 궤는 광야에서 흔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조각목은 가볍고 잘 썩지 않는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이 궤 자체가 보여주는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땅에 가장 비천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썩어짐이나 사망에 놓이지 않은 예수님의 인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이 궤는 안과 밖을 순금으로 싸게 되는데, 이 정금은 하나뿐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화로운 신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어서 13절을 보면 이 궤를 메는 일종의 막대기인 채 역시 정금으로 싸게 합니다. 궤와 그것을 메는 채가 둘 다 금으로 싸인 의미는 궤를 메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존귀함을 받는 자녀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야 합니다.

 

12, 14절을 보면 궤의 밑바닥 모퉁이에 고리를 만들어 막대기()를 넣어 편리하게 이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리성보다 사람이 궤를 손으로 만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게다가 15절을 보면 채는 궤의 고리에서 빼지 않고 그대로 두게 합니다. 자주 채를 빼면 자연스럽게 고리에 접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물 조차도 함부로 근접해서 만지지 못할 만큼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고리에 접촉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거룩을 침해하는 것이며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삼하6:6-7절에 의하면 다윗 시대에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소가 뛰자 법궤를 잡으려는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별 것 아닌 일에 하나님은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첫째, 성도는 조금만 방심하면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는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아갈 때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돕는다는 생각이나 행위, 시도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강한 경고입니다. 이것을 적용해 보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섬기는 것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돕고 있다는 마음은 옳지 않습니다. 일단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을 돕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1:1절에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으로 사용된 원어(둘로스)는 정확히 말하면 자신에게는 의사 결정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에만 완전히 복종하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둘째, 성도는 하나님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어떤 부르심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도 쉬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일을 또 해야 하나? 누구 할 사람 없는가? 이런 생각들이 마음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올림픽 기간입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일등을 한 사람에게 메달이 아닌 머리에 월계관을 주었다고 합니다. 달려갈 길을 다간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딤후 4:7-8절은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경기를 하는 선수들입니다. 마지막에 다들 면류관을 쓰고 다시 만난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궤의 외형을 살폈다면 다음은 궤 안을 살펴 보려 합니다. 16절을 보면 궤 안에 증거판을 두었다고 합니다. 10:2절에 의하면 이 궤 안에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증거판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입니다. 그래서 이 궤를 출26:33절에서는 증거궤라고도 부릅니다.

 

십계명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간단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십계명은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증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거판이라 부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궤 안에 말씀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말씀을 통하여 신앙을 점검하며 성장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록10가지만을 기록하지만 이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삶이 확대 적용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성화의 삶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셋째, 진정한 예배자는 예수의 보혈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더욱 성화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성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변하고 싶은데 변하지 않는 내 모습입니다.

 

어제는 승리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다시 죄로 무너지는 나를 보면서 좌절됩니다. 그런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거리가 됩니다. 예수 믿어도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도 안 납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 믿는 별 것 아니네라는 의구심도 생깁니다. 성도에게 왜 성화가 잘 안 일어나는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속죄소를 살피면서 그 해답을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21절을 보면 속죄소는 궤를 덮는 뚜껑입니다. 이 단어가 덮는다. 자비의 자리라는 두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는 처소로 번역이 됩니다. 이 속죄소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의 성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네모난 상자, 궤 속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또 십계명은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궤 자체는 하나님 말씀을 성실히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분의 공의에 따라 심판 받게 될 것이라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궤 위에 뚜껑이 덮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해서는 단호히 벌하겠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하는 법이 들어있는 궤를, 하나님의 자비를 상징하는 속죄소가 덮고 있다는 것이지요. 뭔가 느낌이 오는지요? 하나님은 율법의 잣대로만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은혜로 구원을 베풀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NASB KJV는 이 뚜껑의 의미를 잘 살려 은혜의 보좌’(a mercy sea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속죄소를 깊이 묵상하면서 느낀 은혜를 성도님들과 남은 시간에 좀 더 나누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잠깐 질문으로만 던져 두었던, ‘왜 성도에게 성화가 어려운가?’를 이제 다루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왜 자꾸 죄에 넘어지고 쓰러지는가? 이 질문들에 답을 찾아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먼저 확실하게 다져놓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이 불확실해서 우리가 다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단지 육신을 가진 인간의 삶이 이 땅에 남아있기에 나타나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이것마저도 영화의 단계에서 완전히 해결 된다는 믿음을 꼭 붙잡기를 바랍니다. 영화라는 마지막 구원의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성도에게 먼저 나타나는 것이 성화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일상에서 거룩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분명 성도는 주 안에서 조금씩이라도 천천히 또는 급하게 변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내 의지와 결단이 작용하는가에 대한 궁금 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능력으로는 성화가 안 되는 이유를 명확히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성화는 윤리나 도덕 그리고 세상 법을 행동으로나 양심으로도 어기지 않고 잘 지키려고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성도는 실패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죄에 넘어지는 반복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잘못된 성화관입니다

 

성화는 주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변화게 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감동이 쌓여갈 때 변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녀들을 바꾸려고 그렇게 잔소리하지만 잘 안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뭔가 감동 먹고 변하고 행동이 바뀌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성화는 분명 성도의 삶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우리의 행위를 바르게 하려는 마음과 태도 의지 결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더 깊이 알아 갈 때,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우리를 변해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 역시 우리가 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를 만세 전에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칭의), 변화는 삶을 살게 하시고(성화), 마지막 때에 완전히 거룩하게 변하게 만드는 영화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 과정은 전적인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성화 역시 행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체험으로 완성 되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해야 합니다. 22절을 보면 하나님의 초대가 들려 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는 음성입니다.

 

성도님들은 성막 뜰만 밟고 가실 것입니까? ‘주일 날 나 하고 싶은 것 안하고 교회 에 와서 예배 시간에 앉았으니 되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입니까? 그러나 아직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성소는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말씀과 기도로 이어지는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경 몇 번이나 읽었다고 만족하십니까?

 

아직도 남은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 앞에서 말씀으로 나를 비추어 보면서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지 철저히 바라 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속죄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은혜의 소리를,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확인하셔야 합니다.

 

성화는 선한 행위를 내가 내 힘으로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도 그렇게 받지 못합니다. 성화 역시 그렇습니다. 성화는 예수 믿고 난 뒤 날마다 짓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용서 받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다음 이어지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성화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성화를 위해 성도는 실제로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야 합니다. 이 말이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은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오늘 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실제적으로 성도의 삶에서 이루어진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주일 예배 장소를 옮겨 불편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올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예배자의 삶을 사는 개인이나 가정과 자녀들이 변할 것입니다. 부모들이 변하고 부부의 말이 변할 것입니다. 가정의 비전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우리 신앙의 성숙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지성소의 궤와 궤 안에 있는 증거판과 궤의 덮개인 속죄소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궤는 이 땅에 임재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궤 속의 증거판은 말씀을 의미하며 죄는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또한 죽음과 심판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도는 궤를 덮는 속죄소를 꼭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에덴을 떠나야만 했던 인간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시고, 부르시며, 다시 사랑의 만남을 갖자고 제안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겠다는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속죄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것을 믿고 매일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복이 가정과 개인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