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1): 성소와 회막  

25:1-9

 


8월은 매우 뜻 깊은 달입니다. 캠퍼스에서 40년이 넘게 예배를 드렸는데 새로운 주일 예배 장소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청년부는 그대로 금요예배와 주중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들은 캠퍼스에서 진행됩니다. 단지 주일예배만 교회학교, 유스, 청년 그리고 기혼자들 모두가 앞으로 결정될 미국 교회에서 드리게 됩니다.

 

새 학기에, 새로운 장소에서, 그리고 1년이 넘게 비대면으로 진행되던 예배가 대면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새로운 예배장소를 갖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 받아주시는 예배를 우리 가운데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참 의미를 전달해 주는 성막에 관해서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혹시나 형식화된 예배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다시 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비추어 나의 예배생활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또한 될 줄로 믿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 성막을 만들어 놓은 곳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펜실베니아 랭커스터에 가면 3/1로 축소된 성막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경기도 평택에 있는 광은교회가 세계성막 복음센터를 짓고 그곳에 성막을 원형 크기로 재현해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성막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오늘은 그 중에 성막의 다른 두 이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문 출25:8 상반절을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라고 말합니다. 먼저, 성막은(Tabernacle)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에서 성소(sanctuary)로도 불려졌습니다.

 

성막은 초월하신 하나님이 땅에 내려와 택한 백성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만물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 멀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다가오기 위해 세상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시고 그곳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 됩니다. 그래서 성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성소는 거룩하다, 성결하다, 구별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하기에 구별이 필요하게 됩니다. 성막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뜰이 있고 다음은 성소와 마지막으로 지성소로 구분됩니다. 이 구분은 사람들의 출입까지 제한합니다. 뜰에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 들어가고, 성소는 제사장들만 출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구분과 제한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서 최고의 거룩을 원하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를 요구하셨습니다.

 

죄는 거룩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뿐입니다. 동물의 피는 죽어 마땅한 인간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죽어야 할 자리에 동물이 대신 피를 흘러 죄값을 속량한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러 올 때 반드시 그들의 죄를 속죄할 동물의 피를 드리는 제사를 요구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도 죄 용서함이 있는 피가 전제 되어야 합니다. 나의 죄를 위해 동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내 죄가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보혈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 없는 거룩한 의인으로 설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불변의 법, 이것이 바로 요4:24절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말씀 가운데 진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는 반드시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를 단지 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수십 년간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출석하지만 하나님을 한번도 만나볼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나야 하는 분이십니다. 보는 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영으로 존재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존재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래도 불안전하게나마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계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보고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죽을 것 같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세워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나타나도 죄와 육신을 가진 인간은 온전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이 땅에 인간이 되어 오신 주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이천 년 전입니다. 이때에도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임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오심 자제를 부인해 버렸습니다.

 

세 번째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이 경우도 사람들이 그냥 말씀을 읽는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을 때 내 속에 임재하는 성령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주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성령의 조명을 허락하여 주셔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 조차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막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광야 생활 가운데 성막 위에 나타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사실 구름과 불기둥은 낮의 불볕 더위와 밤에 사막의 추위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역할입니다. 광야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보호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우리를 돕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들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베푸는 은혜를 한번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것이 단지 교통 사고로부터 구해주시고, 죽을 병에서 낫게 하는 것만 아닙니다.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공기를 만들어 주시고 호흡을 하고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모든 것이 사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 아닙니까? 이런 평범한 은혜만 생각만 해도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막이 자리잡은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광야 40년 생활에서 이스라엘은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지파별로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의 보호가 필요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들 가운데 거하며 우리를 만나기를 정말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33:7 하반절을 보면 성막을 회막(tent of meeting)이라 부릅니다. 성막의 두 번째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는 가장 가까운 곳에 거처를 둔 이유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녀 된(백성) 이스라엘에게 성막은 하나님 아버지를(주인) 만나는 회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삶 한 가운데 거하시며 이스라엘의 모든 일상과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든 삶을 간섭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아픔과 고민을 찾아와 들어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 없이 볼 수 있는 것들은 그냥 보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우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믿음 없이는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믿음 또한 우리가 갖도록 예수님은 부활 후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내 속에 있는 성령을 믿는다면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나의 우울한 마음에 활력을 주십니다. 상한 마음을 아시고 다가와 성령의 기름으로 아픈 상처에 부어 주십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침체할 때 신앙의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러 하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 있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들이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보십시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입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또 사람이 움직이면 성막도 함께 이동합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고 동행하기를 바라신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은 함께 해 주십니다.

 

내가 힘들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가롯 유다에게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던 것처럼, 사탄은 나에게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안 한다는 생각을 집어 넣는 것뿐입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들고,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괜히 하나님만 원망 합니다.

 

이런 소리 많이 들었지 않습니까? 성경공부도 어지간히 하면서 이미 다 배웠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장에서는 왜 기억이 안 나고, 적용이 안 되느냐는 것입니까? 왜 이겨내지 못할까요? 사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화내고 짜증나고 원망합니다. 무너지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일단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난 뒤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왜 성령의 역사가 지금 내게서 일어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뜨겁게 믿음 생활 했던 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활력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보면 놀랍게도 세 가지 성막의 도구들이 함께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도구들의 의미를 간단히 말씀 드리면 1)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전설병이 있습니다. 2) 성도의 기도를 의미하는 분향단이 있구요. 3) 마지막으로 성령을 의미하는 등불을 보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충만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말씀과 기도가 빠지면 성령은 역사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은 영적 전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외가 없습니다. 전쟁 위험이 있는 나라는 훈련소를 운영하여 군인들을 길러 냅니다. 우리도 영적 전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군에 들어가 신병훈련 한번으로 제대할 때까지 훈련 열외 될 수 있습니까? 자대배치를 받고도 군생활 내내 반복해서 훈련 받습니다. 부대 단위 별로 기동훈련이 있습니다. 여름 겨울 계절에 따라 특별훈련, 다른 장소에서 하는 적응훈련, 또 우리와 동맹국의 군인들과 함께 연합훈련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훈련이 신앙생활의 필수 입니다. 훈련 없는 군대는 종이 호랑이와 같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말이야그런 말 소용 없습니다. 사탄은 지금 나의 영적 실력과 무장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많이 남긴 나의 업적과 충성된 나의 과거들은 세상에서는 귀하게 취급해 줍니다.

 

지금 기도와 말씀, 예배자의 삶이 없다면 성도의 손에 있는 무기들은 이미 녹슨 것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녹슬면 제대로 작동 안됩니다. 적을 향해 무기를 들어도 심한 소리만 날뿐입니다.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 성도님들과 교제, 몸된 교회를 위한 섬김과, 전도와 선교 사명을 잊고 있다면 사탄에게 속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아끼고, 교제하는 신앙생활과 즐거움과 소망으로 가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신앙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늘 만족하고 기쁘고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과 그렇지 않는 삶뿐입니다.

 

그리고 저도 간혹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섭섭하고 짜증나고 화나고 더 이상 교회생활도 재미가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입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면 사람과의 관계도 안 좋아집니다. 이것이 바른 영적 진단이고 처방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안되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안 좋게 보이고 실제로 작동이 잘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를 제대로 하고 있지도 않는데 잘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신호입니다. 어떤 일이 내게 닥쳐올지 아무것도 모르는 폭풍전야와 같습니다. 고요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불안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평강이 없고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큰 바다를 횡단하는 조그마한 요트가 그 큰 파도에도 넘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게중심이 배 아래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며 주인 되어 배의 키를 잡고 방향을 잡아 나아가심을 믿고 순종하기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삶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막의 다른 두 이름인 성소와 회막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 속에 머물 때 그 장소를 성소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기 까기 우리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동행하기 위함입니다

 

또 성막의 다른 이름은 회막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까? 왜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께 달려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갖고 싶은 것이 생기면 사 달라고 조르기 위해서입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고장 나거나 작동 되지 않으면 아빠에게로 또 달려 옵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필요한 것들이 생깁니다. 또 내 힘으로는 내 실력으로는 내 경험으로는 풀 수 없는 일들도 생깁니다. 삶이 힘들어졌습니까? 육신적으로 고칠 수 없다고 말하는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까? 무기력함이 나를 누르는지요? 내 힘으로 고쳐보려고 해도 잘 작동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가 있는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모든 형편을 아시고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문제를 자세히 듣고, 아버지의 능력으로 회복시키고,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회복되어 뛰노는 자녀들의 즐거움에 함께 하고 싶어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매일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