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2): 성도의 삶  

요일3:1-10


 

휴가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휴가 중에도 늘 예배장소를 찾는 것이 마음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교회는 새로운 장소에서 예배 드리게 될 것 입니다. 자세한 상황은 예배 후에 준비위원회를 통해 설명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수고하신 준비위원들의 수고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예배 장소를 함께 사용할 미국교회도 참 사랑이 많습니다. 혼자 사용하다 한 지붕에 두 집안이 살면 힘든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 장소를 제공하게 될 미국교회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성도님들 역시 캠퍼스를 벗어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주님과의 동행을 새롭게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불편한 점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껏 공간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고 나아 간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들을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곧 만나게 될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더 사랑하는 마음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이 눈에 보이지 않고 불평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회와함께 지내는 시간이 너무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청년들은 버스를 타고 와야 하지만 예배의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며 신앙생활 이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라이더를 제공하는 분들은 사랑의 나눔이 즐거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7월 한 달 동안 마지막 때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을 더해 가는 삶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24:12절 보면 마지막 때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져 간다고 주님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일 3:4절을 보면 불법은 죄라고 말합니다.

 

결국 죄로 인해 사랑은 식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5절은 말씀합니다. 여기서 ‘나타내신바’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1 절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떠한’의 의미는 놀라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십시오’ 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을 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는 첫째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알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은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천 년 전에만 반짝 한번만 베푼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 마지막 날까지 흘러 넘치는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실 그 사랑 때문에 주께로 돌아 왔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망과 심판에서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놀라운 사랑을 먼저 주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리고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가 왜 예배 장소를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편하고 좋은데 하나님이 움직이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40년이 넘게 캠퍼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넓게 장막을 치라’는 사 54:2 절 말씀을 보는 순간 확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더 넓은 곳에 두고 싶어 하십니다. 더 많은 영혼에 대한 관심과 역량을 확대시켜 나갈 주님의 계획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년 2022년 교회 표어를 ‘장막을 넓히는 해’로 정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역량이 이미 충분하기에 주님은 우리를 이끌고 가실 줄 믿습니다. 만약 부족하다면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수고해 얻은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꿈꾸어 보지도 못한 땅을 주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올해는 ‘말씀이 흥왕 하는 해’로 정하고 나아갑니다. 말씀을 읽는 분들이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난 수가 참석하고 있습니다. 기혼자들의 매일 5, 10장 팀은 물론이고, 수요일 청년부 성경읽기, 성경암송 팀까지 가세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올해 주신 우리 교회의 표어부터 한 번 실천해 보시기를 도전 드립니다(19:20).

 

말씀이 흥왕 할 때 교회는 세상을 이기었습니다. 복음은 더 넓게 퍼져 나갔고 그 속에서 병자들이 낫는 기적들과 귀신들이 물러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분명 동일하신 성령은 우리에게도 같은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그 간증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주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고질적인 우울증과 정신적 육체적 모든 질병이 물러갈 줄 믿습니다. 자녀들과 청년들이 꿈을 꾸고 비전을 바라보며 일어날 줄 믿습니다. 지금이라도 말씀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도전 드립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가 두 번째 살아야 하는 삶은 소망의 삶입니다. 2절을 보면 성도는 비록 지금은 세상의 불신자들과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이 재림할 때에는 그들과는 달리 영광스럽게 변화될 사람이라는 소망이 주어집니다. 성도는 이 소망을 반드시 기억하고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재림 때 성도가 변화 된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좋은 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오늘 이 본문의 저자 요한 세 사람은 영광스럽게 변화된 주님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2 하반절에서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취하였던 태도는 무엇이었습니까? 17:4절을 보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을 짓고 살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런 소리를 했을까요? 그리고 그가 어디에 머물기를 원했을까요? 바로 그곳은 우리가 나중 누리게 될 영원한 천국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을 가질 때 성도는 이 세상의 힘들고 어렵고 죽을 것 같은 시간을 뛰어넘게 만듭니다. 조금만 참으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으면 왜 지금 잠깐인 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겠습니까? 이 소망이 있기에 핍박으로 오는 죽음까지도 담담히 이겨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은 구원의 마지막 감격을 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시간의 즐거움과 환희의 순간을 남겨 두고 있다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육체를 가졌기에 죄와 싸우며 넘어지고 일어서는 성화의 단계를 저와 여러분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성도가 넘어질 때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승리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묵묵히 믿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죄와 싸워 이기기를 응원하십니다. 세상은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줄 압니다. 가지고 있는 명예 잃어버리면 죽는 줄 압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런 것 없어도, 또 있다 없어져도 다시 힘을 얻습니다.

 

지금 힘든 분들이 있다면 재림 때에 주님과 같이 영광의 몸으로 변한다는 이 소망을 주 안에서 발견하기 바랍니다. 그럴 때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과 차별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3절을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를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받기 위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사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한 삶이요 나 중심의 인생이었습니다.

 

‘내가 잘 되어야 한다. 잘 되고 보자. 무조건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앉자’가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될 때는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바울처럼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가지고 누리며 살아도 이제 내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땅에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세 번째 삶을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불법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부 하나님 때문입니다. 5절 하반절을 보면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죄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의 신분은 이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는 죄 가운데 있었기에 죄인이었습니다. 죄를 짓기에 불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는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성도의 신분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9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런 능력이 성도에게 있다는 것에 처음 놀랍니다. 다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더 놀랍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듭니다. 여전히 죄를 짓는 나를 보면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닌가? 또 주 안에 있지 않는단 말인가? 라는 의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더 자신들을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나는 정말 주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 있습니까? 분명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마음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인으로 입술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어제는 죄를 안 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고 난 뒤부터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에도 죄를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예수 믿고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는지요? 물론 간증을 듣다 보면 강도나 도둑이 예수 영접하고 회개하고 바로 돌아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도둑질은 다시 하지 않아도 다른 죄는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여전히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 것 일상에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생각으로 짓는 죄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대부분의 성도가 이 문제로 고민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습니까? 믿고 난 뒤에도 죄 짓는 모습이 현실에서 나타난다면 6절의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9절의 하나님께로 난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것이지요.

 

첫째 의미는,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보혈로 죄 없다 함을 받은 의인들은 죄를 지어도 용서함 받는 시스템이 우리 속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믿기 전에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가 쌓여서 해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성도는 요일 1: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말씀처럼 죄를 자백만 하면 죄가 용서함 받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죄가 남아 있어야 죄를 짓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기에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사람이라고 조심스럽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으로 끝난다는 구원파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이 또 생깁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 순간 종말이 와서 회개를 못하면(or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리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 시작할 때 주의 재림 때에 우리가 주님과 같이 변화될 것이라는 2절 말씀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없어 회개하지 못해 용서 받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주님 앞에 서는 우리의 모습이 이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이 답을 줄 것입니다.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현재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신다는 뜻입니다(칭의).

 

조심스럽고 부족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구원은 우리의 착한 행위에 의해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이 또 한 번 증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마지막 질문은 말씀처럼 재림 시에 영광스럽게 우리가 변할 것이라는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로 6절과 9절의 말씀 그 자체가 답이 됩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예수 믿는 사람은 반복해서 습관처럼 죄를 지속적으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성도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래서 술주정뱅이가 예수 믿고 술을 끊게 됩니다. 때마다 일마다 점을 치러가는 사람이 발길을 멈추게 됩니다. 우상을 버리게 됩니다. 강도가 담을 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완전히 죄로부터 돌아서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님입니다. 죄를 지으려고 할 때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복되는 죄를 끊고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게 성화로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 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당당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내속에 내주하는 성령의 도움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하는 속도는 나 자신의 순종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참 놀랍게도 나를 순종하게 만드는 것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나의 고집과 아집을 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말씀이 강하게 다가와서 뜨거워지고. 이길 수 없는 힘에 의해 굴복하는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빠르게 변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말 느리게 변합니다. 10억 분의 1 미터(나노미터)’ 만큼 변하면 우리는 변화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한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세상에 선포하는 삶이 책임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이 가장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는 죄입니다. 그런데 죄의 근원인 사탄을 멸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오직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믿는 것이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독한 어려움과 환란이 다가올 때 잠시 이 시간이 지나면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을 맛보며 사는 소망을 품는 삶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 영광의 시간이 오기까지 이 땅에서 죄 짓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사는 마지막 때의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