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21): 향기 나는 삶을 살게 만드십니다

12:1-8

 


오늘 본문을 보시면 유월절이 다가왔고 예수님 일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되게 됩니다. 12:1절을 보면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베다니에 이르게 됩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예루살렘과 겨우 2-3km 정도 밖에 안되기에 12절을 보면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사랑하는 나사로 가족들이 살고 있었기에 이곳을 찾아 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 너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와 마가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3가지) 차이점이 발견합니다. 요한은 2절에서 거기서라고 말합니다. 베다니는 확실하지만 나사로의 집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한편, 마태(26:6)와 마가(14:3)는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정황을 다시 구성해 보면, 먼저 주님 일행이 베다니에 도착합니다.

 

언젠가는 모르지만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한 동네 사람들이다 보니 그곳에 나사로도 함께 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요한과는 달리 마태와 마가는 나사로의 이름조차도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마리아라고 이름을 밝히는 요한과는 달리 마태(26:7)와 마가(14:3)는 단지 한 여인으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기록된 시간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요한보다 먼저 기록을 남깁니다. 그들이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길 때는 아직 나사로와 마리아가 살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요한이 기록을 남길 때는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그들이 죽고 난 뒤라 안심하고 이름을 거론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12:10절을 보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 역시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차이점은 마태(26:7)와 마가(14:3)에서는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발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기름을 주님의 머리에 부었는데 그것이 발에 흘러 내린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마리아가 향유를 머리와 발에 부은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결론은 마태와 마가 그리고 요한의 기록은 베다니 시몬 집에서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동일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한 여인이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이야기가 눅 7:38절에 하나 더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요한복음(마태, 마가)과는 다른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3가지 이유).

 

1)이유는, 시간상으로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의 기록은 예수님의 사역이 한창이던 시간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2) 요한은 사건의 주인공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임을 밝히고 있는 대신, 7:37절은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말합니다.

 

3) 요한은 향유를 붓고 난 뒤 가롯 유다가 여인의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을 기록합니다. 한편 누가는 집 주인인 바리새인을 예수님이 꾸짖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다른 이야기로 보는 것이 좋다고 신학자들은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정도 배경적 지식을 가지고 오늘 말씀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집에서 한 여인이 보여주는 행동들의 시각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여인이 향유를 발에 붓는 과정에서 온 집안을 채우는 향기를 한 번 느껴 보기를 도전 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향기 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집중해서 본문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천 년 전 한 유대 마을 사람들이 맡았던 그 향기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만들어 내어야만 하는 향기는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향기를 낼 수 있을까?입니다.

 

오늘 한 여인이 잔치자리에서 나게 한 아름다운 향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그냥 난 것이 아닙니다. 그 여정을 한번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2:2절을 보면 예수를 위한 잔치가있었습니다. 마태는 단순히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26:6)라고 말합니다. 마가는(14:3)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라고 좀 더 구체적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위한잔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인해 나온(때문에 생긴) 향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 향기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 코넬한인교회와 성도님들의 삶도 주님을 위한 잔치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향기가 많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초청한 집 주인 시몬이 등장합니다. 그는 의사들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인 나병에서 치유 받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나병은 모든 삶으로부터 환자를 소외시키고 공동체로부터 이탈되게 만듭니다. 그런 병에서 치유 를 받았다면 그의 인생에서 이보다 기쁘고 기억할 만한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이런 감사를 담아 주님을 잊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것입니다. 함께 한 나사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 주에 보았지만, 죽었다 다시 산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 받던 자로 주님 곁에 늘 가까이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눅10:40절에서도 보듯이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여인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주님을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오빠를 살려준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집도 아니고 남의 집에서 드려지는 잔치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고 일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등장 인물들에게서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모두가 주님께 집중하고 주님을 위하는 모습들입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 때문에 한 자라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각자는 주님을 향해 감사의 아름다운 자신만의 향기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1) 감사는 주님을 향한 성도의 향기입니다. 본문의 장면을 상상해 보면 주님도 이들의 모습을 보며 참 흐뭇해 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자리로 한번 돌아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도 주님께 감사할 만한 일들이 있는지요? 정말 잔치를 베풀 만큼 내 인생에서 큰 사건이나 일들이 나에게 있는지요? 우리 성도님들은 최근에 어떤 것들을 감사하며 각자의 삶에서 주를 위한 감사의 향기를 내고 있는지요?

 

감사 제목을 찾느라 고민하지 말기 바랍니다. 가장 우선적이고 아침마다 눈을 뜰 때마다 감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이 감사를 최우선의 향기로 삼고 날마다 내 삶에서 풍겨 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알고 주님을 따를 때, 반드시 주님이 성도에게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모습은 주님을 위한 아름다운 두 번째 향기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지금도 그 향기를 품고 있는지요? 잠시 있다 잃어버린 분이 있다면 다시 되찾기를 도전 드립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지 못하는 현장들이 있습니다. 선교지에 격려의 영상 편지를 만들어 보낼 수도 있습니다. 힘들어하고 혼자 있는 분들을 찾아가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새 학기를 맞아 오실 분들을 위해 라이더를 제공하고 시간을 내어 이타카를 안내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향기를 내어야 할 곳이 비어 있는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 성도님들이 향기가 되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오늘 잔치를 마련한 이 집 주인처럼 잔치 자리를 마련해 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 팬데믹도 이제 백신접종으로 점차 제한들이 풀려가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가족들에게 일어난 감사의 자리에, 아니면 성경을 읽고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에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 주인 시몬처럼 나의 감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사를 더해 가기 바랍니다. 또는 마르다처럼 직접적인 섬김을 통해 감사하는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향한 섬김은 메마른 광야와 같은 세상 한 가운데서 성도를 통해 만들어져야 할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세상은 우리 성도들의 봉사와 구제와 섬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섬김의 향기가 성도님들의 가정과 우리교회에서부터 세상으로 퍼져 나갈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보면, 베다니 잔칫집에서 한 사람만 빠지게 됩니다. 동생 마리아입니다. 3절을 보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그때 그녀가 깨뜨린 옥합( 26:7)으로 인해 온 집안이 나드 향으로(12:3) 가득하게 됩니다.

 

순전한 나드라는 말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서 향기가 정말로 제대로 나는 그런 최고의 상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근은 340g(12온스) 정도입니다. 이 향유는 원산지가 인도로 알려져 있기에 분명 수입품이었을 것입니다. 먼 외국으로부터 온 귀한 것이기에 지극히 비싼것은 당연합니다.

 

12:5절에 의하면 삼백 데나리온 정도 값어치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하루 노동자의 임금이라면 거의 일년 치가 넘는 값에 해당됩니다(십 만원이면 삼천 만원). 마리아 개인에게도 가장 귀중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3) 마지막 향기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때 나는 향기입니다.

 

먼저 마리아는 어떻게 이런 귀한 것을 가질 수 있을까요? 열심히 돈을 벌어서 구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그런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마리아 가정이 상당한 부자였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3가지).

 

예수님과 12명의 제자 일행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는 이 집에 들러음식을 먹고 머문 집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또 요11:19절을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많은 조문객들이 집을 찾는 모습 등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처녀인 마리아가 수입품인 비싼 향유를 갖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런 것을 뒤로하고. 아무리 부자라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있는 향유를 남의 발에 붓는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남의 집에서 일어난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오기 전에 이미 향유를 드려야겠다는 마음의 결단이 있었기에, 미리 가지고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질문이 또 생깁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향기 나는 삶이 가능한가?’무엇이 마리아처럼 살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1)나의 전부인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보다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녀의 심령 속에 이미 들어와 가장 귀한 분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들도 이미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마리아처럼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드리는 것은 각자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매일(매 주일)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온전한 예배는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해도 라는 것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죽고 살아나신 십자가를 알게 되면 바뀌게 됩니다.

 

나사로 사건을 통해 주님을 진정으로 알게 된 후 마리아가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는 사람은 예수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눅 7:46절을 보면 귀한 손님이 집을 방문하게 되면 존경을 표하는 관습에 따라 기름을 머리에 붓습니다. 마리아는 감람유 보다 훨씬 귀하고 비싼 향유를 깨뜨려서 온전히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까지도 닦아 드립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남자 앞에 여자가 머리를 풀어 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 당시에는 수치로 여겨졌지만 그녀는 전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머리카락은 신체의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입니다.

 

머리털로 발을 닦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을 주님께 드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보이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고 최고의 헌신을 주님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런 드림과 헌신의 향기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을 향한 주체하지 못하는 감격이 우리 성도님들 개인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에게 베푼 은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처럼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분들은 모두가 주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드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결단이 생기면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고 행동으로 옮기기 바랍니다. 저는 목사가 되면서 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드리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설교 준비를 멈추고 눈물로 기도하며 아직도 나를 위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한번에 깨뜨려 드리지 못하고 조금씩만 포기하며 살아왔던 나의 삶을 회개했습니다. 내 것 드리는 것 아까워하지 않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 우리는 최고의 드림과 최대의 헌신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오빠가 살아나는 역사를 통해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생생히 체험하게 됩니다. 11:5절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늘 사랑 받는 자로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변합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고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본 후로, 주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시며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만 받기를 원하던 그녀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만 받기를 원하는 사람에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기 원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주 안에서 죽음과 살아남을 체험한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2)주를 사랑하는 자로 변할 때 나의 귀한 것을 드리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낼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릴 때 받았던 축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4:9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엄청난 칭찬을 받은 여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허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최고로 생각하는 한 사람의 드림을 축복합니다.   

 

주님이 진짜 감동한 사람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표현될까요? 마리아처럼 정말 물질적으로 비싼 것을 드리는 것입니까? 그러 모습 때문에 주님이 감동하고 칭찬하셨을까요? 그러면 돈 없는 사람은 주님을 감동시키지도 못하게 되겠네요? 과연 그런 주님이실까요?

 

주의해서 바라보아야 할 마지막 대목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가장 예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생길 때 모든 것을 드릴 수 있고 무릎을 꿇어 그분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받기만 원하던 사람이 이제는 내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최고의 향기입니다.

 

이천 년 전에 한 여인에 의해 깨뜨려진 옥합으로 아름다운 향기가 났습니다. 그 향기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들에게도 그 향기를 맛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 코넬한인교회가 주님을 최고로 여기는 마음과 감사와 섬김으로 인해 이타카와 코닝 지역을 아름다운 향기로 채우기를 소망합니다.

 

증오와 교만으로 채워져 있는 이 땅을 사랑의 향기로 채우고, 죄악으로 채워져 가는 이 시대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로 채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랑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줄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