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20): 부활이 지금 나의 믿음이 되게 만드십니다 

11:17-23

 


정말 빨리 지나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기다려 본 적이 있는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초 대박 복권에 당첨되어 엄청난 돈을 탈 것을 기대하는 분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가능하다면 시간을 더 빨리 돌려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마음으로 고통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 한 분만 자기들에게 오기만 하면, 정말로 힘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가능하게 되고, 게다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11:1절을 보면 이들은 베다니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빠 엄마는 일찍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단지 마르다와 마리아 남매와 나사로라는 오빠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가정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오빠가 병이 들게 됩니다.

 

그러자 3절을 보면 동생들은 그들과 친분을 가져왔던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리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 병든 소식을 알리고는 있지만, 예수님을 급하게 오라고 요청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1)먼저 오빠의 병이 지금 곧 죽게 될 정도는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2) 아니면 너무나 바쁜 주님의 일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부탁을 드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3) 또는 요10:33절에서 보여주었듯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죽이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위험스런 부탁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10:40절에 의하면 지금 예수님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에 있었습니다. 1:28절에 의하며 이곳은 요단 동편의 베다니였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사는 곳은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베다니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2-3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베다니로 오게 되면 요10:39절에서처럼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을 고려했는지도 모릅니다. 4)마지막으로, 주님이 자신의 오빠와(3) 자매 모두를 사랑하시기에(5) 소식만 전하면 급히 달려 올 것을 은근히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동생 마리아의 태도에서 볼수 있습니다. 오빠가 실제로 죽습니다. 그러나 요11:17절을 보면 주님은 나흘이 지나서야 도착하게 됩니다. 20절을 보면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는 나가서 맞이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 마중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녀의 행동은 병든 오빠의 소식을 전했는데 오지 않는 주님에 대한 마음 상함이 일차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소식을 전한 그 시간에만 왔더라면 오빠가 치유되고 죽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현실은 오빠는 죽었고 나흘이 지났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이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언니라는 책임감 때문인지 모르지만 마르다는 주님을 맞이하러 나갑니다. 주님을 본 마르다는 21절에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르다는 주님에게 왜 늦게 왔느냐고 비난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병든 오빠 곁에 주님이 와서 있었다면 어떻게든 손을 쓰셔서 오빠가 죽지는 않게 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말 속에는 들어 있습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 아쉬움과 그것을 제공해 주지 못한 주님에 대한 원망 같은 이런 복잡한 감정이 들어있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르다의 말이 22절에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언뜻 듣기에는 이제라도 예수님이 죽은 오빠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한다는 소리로 들려 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상으로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 났느냐는 다툼의 여지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신 적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8장에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이런 기적들을 알고 있기에 마르다가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님이 죽은 사람들을 살린 사건들이 지금보다 나중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죽은 자들을 살린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왕상 17:22절에서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그의 제자 엘리사 역시 왕하4:34절에서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립니다.

 

게다가 중요한 단서는 바로 요11:4절입니다. 오빠가 아직 죽지 않았을 때 그녀들은 사람을 주님께 보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기억했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지금 오빠가 죽긴 했지만, 이런 것들이 근거가 되어 마르다는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은근히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그래서인지 23절을 보면,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고 바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깨뜨려 버리는 반전이 24절에서 일어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니이다” 라고 상당히 온도 차이가 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놀랄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1) 주님은 지금 오빠를 살린다고 말하는데, 그녀는 오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미래에 있을 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2) 만약 그녀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알았다면, 지금 그녀는 주님을 그들보다 못한 분으로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게다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딸을 살린 기적을 이미 듣고 알고 있다면, 지금 오빠를 살린다고 하는 주님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엄청난 그녀의 기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21절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는 말 속에는 사실 원망이 더 강합니다. 그렇지만 22절에서 뭔가를 기대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자 23절에서 주님은 그 기대를 현실로 나타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녀의 기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에게 있는 듯, 없듯 들려왔던 원망 때문입니다. 원망은 그녀의 기대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원망 섞인 기대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기대와는 또 다릅니다.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믿음이 못 됩니다. 확실하게 신뢰하고 정확히 자신이 말한 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마르다는 ‘내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아나이다”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듣고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39절에서 실제로 무덤 앞에 주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할 때 마르다는 자신에게 부활의 믿음이 전혀 없음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서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가 말하면 24절에 마르다는 매우 구체적인 부활을 믿고 있지 않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녀의 부활에 대한 생각을 주님은 전혀 칭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것을 25-26절에서 선포하십니다.

 

그녀가 갖고 있는 부활에 대한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신 부활에 근거한 부활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았는데 무슨 부활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떤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못 믿는데 나중에 살아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도 이해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떤 부활을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부활관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이미 당시 유대인들은 주님이 부활을 가르치기도 전에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2:18절을 보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주님이 이 땅에 오기도 전에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사상은 어디로부터 전해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부활관이 옳았다면 왜 그들을 칭찬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활관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조금만 하고 앞으로 계시록을 다루면서 더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일단 마르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그녀가 믿고 있는 것은 마지막 때의 육체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이미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부활사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이런 논쟁을 뒤로하고,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생겨날 부활신앙에 집중해야 합니다.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며 26절에는 “이것을 네가 아느냐고 묻지 않고 믿느냐”고 질문합니다.

 

‘나는 부활이요’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직접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첫 부활의 열매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가 부활을 말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 이상 거짓일 뿐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부활사상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이들보다 훨씬 먼저 시간상으로 처음 말하는 것은 역시 구약 성경이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11:19절은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 부활신앙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세상의 어떤 소리들로부터 흔들리는 믿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있을 예수 안에서 미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약속된 영생을 의미합니다. 마르다에게 이 부활을 믿느냐고 묻는 질문에 27절에서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39절에서 무덤에서 돌을 옮겨놓을라고 주님이 말할 때 그녀는 회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마르다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실제 죽음 앞에서 부활을 확실히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 앞에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부활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가 붙들고 살아가야만 하는 지금 나의 믿음입니다.

 

2:20절처럼 성도는 예수 믿는 순간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체험합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망에서 살아난 것처럼 주님과 함께 살아남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기에 육신의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더 이상 갖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 살아본 사람이 다시 죽는 것을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산 경험을 해 본 사람이 어찌 부활을 믿지 못하고 흔들리겠습니까? 그리고 부활신앙을 지금 나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믿는 순간부터 내 속에서 시작 되는 확신입니다.

 

주님은 나 역시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영원히 사는 생명을 우리 속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영생이라는 축복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 부활은 먼 나중이 아니라 믿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갖는 부활신앙입니다. 죽어서부터 아니라 하나님과 이미 동행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얼마나 자신이 생깁니까? 내 옆에 내가 걱정하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 든든한 분이 늘 계십니다.

 

나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 모든 것들로부터 안정과 평강을 만드시는 분이 내 속에 내주하십니다. 캄캄한 흑암과 같은 세상을 걸어가도 빛이 되신 주님이 내 발의 등불이 되어 비추십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혼돈스럽게 만듭니까? 이처럼 확실한 믿음을 주는 신앙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다른 종교들은 우리를 ‘신’이 되라고 말합니다. 될 수 없는 잘못된 명제입니다. 부활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려 줍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라는 심판 앞에 서야만 합니다. 영원한 죽음이라는 사망의 늪에서 나올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늪에서 우리를 건져낼 구원자가 바로 십자가에서 살아나신 주님이십니다.

 

사망을 이긴 오직 한 분 만이 사람들에게 부활을 경험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에 우리를 그분 속으로 끌고 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거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기만 하면 그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망을 이긴 생명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마지막 때에 다시 살아나는 성도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부활의 역할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부활신앙은 성도의 능력이 되게 만드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무너짐과 방황함과 죄 짓는 삶 가운데서 능히 이겨내도록 다시 힘을 주시며,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내가 무너진다고 내 속에 계시는 주님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실패 할 수 없습니다. 좌절도 포기도 않습니다. 스스로 무능력하다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죽음에서 일어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승리하기를 원하고, 주의 말씀에 거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부활 신앙을 가질 때 우리 앞을 가로 막는 최대의 적인 죽음의 돌이 옮겨질 줄 믿습니다. 우리 수족을 묶고 있는 걱정과 염려와 슬픔과 무능력으로 해방시킵니다. 늘 죄 용서함 받는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 부활이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나의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