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9): 선한 목자이십니다

10:1-6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땅을 일구며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농사에 필요한 목축업이 함께 발달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경작지를 일구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소의 힘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부족한 식량을 가축 등으로 대체하는 삶이 자리잡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타인은 목축생활이 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우량의 부족으로 인해 가축들을 데리고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는 삶이었습니다. 정착보다는 떠돌이 생활이 익숙한 문화입니다. 사람들이 가축 중에서도 양을 기르는 목적은 우선 제사나 가족의 생계, 그리고 의복을 위해서입니다.

 

양을 기를 때 집을 떠나 들이나 산지에서 거하게 됩니다. 이련 경우는 임시로 억센 가지로 울타리를 만들고 야영을 하게 됩니다. 조금 더 발달된 형태는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양들을 한 곳에 모아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는 돌이나 흙으로 높은 담을 쌓고 양을 지킬 우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강도나 다른 짐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담 위에 가시덤불을 세워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출입구를 하나 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곳을 통해 주인들은 우리 안으로 양들을 들여 보낸다고 합니다. 아침이면 주인이 와서 양을 부르는 목소리나 신호를 들으면 신기하게도 그 주인만 따라 방목지로 향한다고 합니다.

 

양 주인들은 직접 번갈아 가면서 양들을 밤새 지키기도 하지만, 많은 양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돈을 주고 양을 지키는 사람들을 고용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요10:12절에서 말하는 삯꾼들입니다. 이들은 일정 계약을 맺고 보수를 받고 남의 양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배경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도 중요하지만 요한복음 전제의 영적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요한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10:6절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에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10절에서도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는 말씀이 저변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꼭 당시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속에는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씨 뿌리는 비유, 알곡, 겨자씨, 누룩, 그물 등 여러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비유들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삶에서 직접 사용하고 있는 것들을 이용했습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교육 자료인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제자들도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시 잘 알려진 목자들의 삶을 통해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1절부터 보려고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을 보면 아멘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뭔가를 확실히 가르치기 위해 듣는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1-2절을 동시에 보면 누군가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의 양의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가는 것과 2절의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차이점을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차이 나게 행동하는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밝고 있습니다. 양의 문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양을 몰래 훔치고 도둑질하려는 절도며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로 대조가 분명합니다. 여기서 양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즉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양의 우리는 오늘날 교회이며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절도며 강도는 본문에서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고, 그들이 가진 권위만을 내세우며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대적하며 비진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되기에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한편, ‘목자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냈던 주의 종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상 당연히 양의 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문지지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연다고 할 때 문지지와 양의 목자가 따로 구분 됩니다. 하지만 주인이 직접 문지기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예수님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문과 연관되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 자신을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황당한 소리처럼 들립니다. 뭔가 연결이 안됩니다. 양의 목자나 문지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은 그냥 문이고 사람을 지칭하기에는 너무 어색합니다. 갑자기 어떻게 예수님이 목자도 아니고 문지기도 아닌 양의 문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을 개인적으로 묵상하는 분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미리 제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배경을 앞에서 잠깐 말씀 드렸는데요. 양의 우리에는 대부분 문짝이 없이 그냥 아치형으로 만든 문이라 부르는 입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목자들은 그 문 입구에 기대어 밤을 지내곤 합니다. 따라서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양의 우리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목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양의 문이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목자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이 양들을 지키기 위해 문에서 직접 누워서 지키시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우리가 자리에 눕고 일어나는 것 모두를 주님이 지켜 주십니다. 아침이면 얼마나 많은 뉴스를 접하게 됩니까? 많은 사고와 재난 등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고가 나에게는 안 일어나고, 내 가정에는 영향이 미치지 않아서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성도가 재해나 상해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문지기는 강도들이 들어오는 것을 미리 막는 역할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이 전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를 지키는 하나님이 질병이나 사고로부터 모든 것을 막아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이 있기에 출애굽을 하기 전에 여러 재앙들을 내렸습니다. 특히 애굽 사람들이 사는 땅과 그들에게만 재앙을 내리기도 하셨습니다(4번째 파리부터). 하지만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명백한 구분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재앙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개구리, )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나 사건 등에서 성도는 예외다 아니다를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개입이기 때문입니다(객관화 어렵다). 너에게는 일어나지만 나에게는 안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기적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삶에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존재하는 사고와 사건 속에 노출됩니다. 듣다 보면 실망이 됩니다. 그렇다면 일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별한 보호하심은 없다는 것입니까? 있다면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제)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 매일 보여주는 모습을 보기 바랍니다. #1) 3절을 보면 아침이면 일어나 양 우리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불러 냅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그 상황에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 주시는 참된 목자가 있다는 이 믿음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어제 밤에 강도가 들어 힘들게 하고 아프고 죽음과 같은 일이 있어도 다시 일어나 가자는 제안입니다. 이 축복을 매일 아침마다 체험하기 바랍니다. 매일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매일 목자와 양이 긴 어두운 밤이 지나고 처음으로 만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 어제 밤 아팠는데 좀 어때? 좀 나았는지를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하면 걱정이 됩니다. 아픈 기색이 보이면 그때부터 약 준비하고, 심하면 의사한테 전화합니다. 나의 상처에 가장 적합한 캐어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나에게 다가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아무 이상 없니? 아픈 곳은 없어? 아팠던 곳은 좀 나았니? 라고 물으시는 매일의 주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프면 어디가 아프다, 힘들면 무엇이 힘들다는 것을 주님과의 대화로 하루를 열어갈 줄 믿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이 관계가 빠지면 양과 목자와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이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시고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 관계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기를 바랍니다. 잠시 쉬고 있는 분이 있다면 다시 이 시간부터 회복 되기를 도전 드립니다.

 

#2)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이 매일의 삶에서 허락 하는 복은 3 하반절을 보기 바랍니다. 양들을 우리에서 다 내어 놓은 후, 목자는 푸른 풀이 있는 곳을 향해 앞서 가며 그들을 인도합니다. 매일 우리를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푸른 꼴을 먹고 배부르게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최상의 목초지로 이끌고 가는 삶의 배려가 있습니다. 

 

일상이 지겹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이 반복되는 것은 우리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고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프지 않다는 뜻입니다. 일상이 깨어지기 않는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매일 같은 해를 보게 하시고 일어나게 하시고 직장에 나가는 것 복입니다. 

 

졸업이나 취업 그리고 인턴을 잡거나 승진되거나 주식 투자한 것 엄청 올라가면 감사합니까? 매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에 정말 두 손 들고 감사하시는지요? 매일 밥 먹으며 눈물 흘리며 감사를 표하는 성도는 정말 보기 힘듭니다. 자녀들은 한 학기 집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집에 오면 조금 달라집니다.

 

아이들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한 끼 정도는 맛있다고 말하고 감사도 표하기는 할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부모가 자녀들에게 맛 없는 것 줍니까? 더 맛있는 것 먹이려고 날마다 아이들 불러서 먹이고 애쓰는 것이 부모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최상의 것을 양들에게 제공해 주고 싶어 날마다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부름에 응답하시고 감사가 이어지는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의 감사는 매일 감사이며, 정말 사소한 일상에서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를 불러내어 매일 인도하신 주님을 따르다 보면 얻는 최종적인 복을 언급 안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9절과 10절의 구원과 생명과 풍성한 삶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맡고 적용할 책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는 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9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11절 말씀처럼 양들을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기에 우리는 그 문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특별히9절에서 누구든지라는 말은 구원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나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한 분만이 그리고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절대적 진리가 선포입니다. 게다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일상적인 삶에서 지속적으로 성도들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해 줍니다.    

 

이것은 10절에서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평생 동안 성도가 풍성하게 얻게 되는 신령한 은사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빛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신령한 성령님의 선물들입니다. 

 

#4) 마지막으로, 선한 목자를 매일 따를 때 양들이 받는 복은 무엇일가요? 목자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뭔가를 맡기며 책임을 주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승이 평생 배우고 따른 제자에게 뭔가 사명을 주지 않는다면 그 제자를 신뢰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16절을 보면,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언뜻 듣기에는 주님이 직접 다 전도와 선교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려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세상에 양의 우리에 들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수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들도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이 땅의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전도와 선교의 사명은 부담이 아니라 엄청난 복입니다. 우리 성도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지상명령은 주님이 우리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를 신뢰하며 주님이 직접 내게 맡겨주신 직분과 사명들 온전히 감당하는 양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양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또한 그의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물론 매일 풍성한 삶을 제공하십니다. 날마다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가 이어지기를 도전 드립니다.

 

선한 목자가 허락하는 복은 배 부르게 하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높은 곳에 앉는 번영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오히려 환난을 당해도 그 속에서 평온함을 누리게 하는 복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예수 안으로 끌고 들어가 그 분 안에만 있는 평강을 맛보게 하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아픔 가운데 있을 때 혼자 이겨내려 합니다. 아니면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대려 합니다. 그러나 주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 안에는 아픔과 눈물과 고난과 슬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먼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분들은 주님께로 가는 길이 만들어져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 그 길이 열립니다. 다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신 분들은 이제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늘 이어져야만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주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은 주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성도는 양들처럼 우리의 선한 목자가 매일 인도하는 데로 따라 가야만 합니다. 주인의 목소리를 아는 양들처럼 우리를 매일 부르는 음성에 응답하며, 예수만 좇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