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8):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는 일을 나타내십니다. 

9:1-3

 


유명한 도시를 여행하거나 출장을 가게 되면 사람들의 눈을 끄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는 사람들의 관심들은 다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나 강 같은 환경을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도시 건물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또 가족들 선물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주님은 길을 가고 계셨습니다. 어디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7절에 실로암 연못과 13-14절에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이 언급 되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 거리로 추정됩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긴 했지만, 예루살렘은 한 나라의 수도로서 상당한 무역과 상업 등이 발달했던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평소 이만 오천 명 정도가 살던 큰 도시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에는 12-15만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시골 사람들이라 볼 것도 많은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많은 것들이 그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상상해보면, 아마도 제자들은 목적지를 향해 스승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앞서 가던 주님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한 사람을 보았다고 알려 줍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단지 ‘날 때부터 보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이름도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마치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처럼 그에게로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힘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십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몇 주 전에 요한복음 5장에서 보았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람도 38년 된 병자처럼, 당시 의술로는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건을 통해 요한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곤란에 처해 있어도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는 사실입니다. 포기할 만큼 어려운 문제는 주님 앞에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너무 오랜 기간 치유하지 못한 병이든, 의사 조차도 손 델 수 없는 병으로 눈물 흘리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사람은 평생 동안 병자였습니다. 오늘 이 사람도 사실 그의 나이가 몇 살 정도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21절에 의하면 그의 부모는 ‘그를 장성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십대는 아니고 이십 대는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역시 긴 아픔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실 때까지 내가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꼭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 온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인내하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5:3-4절 말씀처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연단을 통해 바라는 소망을 이루기 원함입니다. .

 

앞을 못 보는 사람과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 두 사람은 긴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다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주님이 먼저 관심을 갖고 다가 오심으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사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주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따라오며 고쳐 달라고 고함치지도 않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병자를 데리고 오거나, 아니면 부모가 찾아오든지, 아니면 아픈 종을 위해 주인이 직접 와서 고쳐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주님의 일방적인 개입으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보면서 ‘왜 나에게는 주님이 관심을 갖지 않으시고 다가와 주지 않느냐?’고 우리는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3 하반절을 보면 주님이 그에게 다가온 이유를 발견합니다. 주님이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오셔서 치유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 내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질병을 가진 누군가에게 언제 다가가는 것에 관한 힌트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긴 하지만, 주님이 오래되고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어렴풋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이나 아픈 분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내용은 이제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픈 사람은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는 일을 위해 그렇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분명 오해입니다. 꼭 사람이 병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병의 원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고 일반화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기 바랍니다. 얼마나 다양하게 하나님의 손에 사용 되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아픈 분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데 사용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모두가). 

 

그렇다면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6절을 보면 예수님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줍니다. 그리고 7 상반절을 보면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하십니다. 말대로 실로암에 가서 씻었는데 나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1) 예수가 불치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능력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치병을 고치는 것만이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것뿐이었더라면 굳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목적만이었다면 능력 많은 선지자 엘리야를 한 번 더 보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치유 이상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이 눈을 뜨자 복잡한 일에 휩싸이는 것부터 보도록 하시지요. 10절을 보면 늘 이 사람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에게로 갑니다.

 

15절에서 다시 한번 바리새인들로부터 어떻게 치유를 받았는지 두 번째의 질문을 받게 됩니다. 11 상반절과 15 하반절에서 그의 대답은 전부 예수가 고쳤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그 사람’ 이라고 지칭합니다. 여기까지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예수님은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의 사람 정도라는 것을 믿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납니다. 16절을 보면,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어기며 병을 고쳤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아나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한 부류입니다. 또 다른 그룹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 한 사람의 불치병을 낫게 함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병 고침의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늘로 온 메시야임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나타내 주고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긴 하지만 유대인들 가운데 이런 부류가 생겨났음을 요한은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도 이들 가운데 속했을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지요. 이어서17절을 보면 자신들 속에 생겨난 논쟁을 수습하려고 바리새인들은 눈 뜬 사람에게 이제는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 하느냐?’ 고 묻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예수님을 ‘선지자’ 라고 말합니다. 사실 정답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그가 경험한 예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리새인들 즉 산헤드린이라는 공회원들 앞에서 당당히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주눅들게 하는 위압감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고친 예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의 대답에 바라새인들은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18절의 유대인들의 반응은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정말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기적 자체를 아예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 정도로도 인정하기가 싫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부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인정 받으려고 이번에는 교활하게 그들이 가진 권력을 사용하려 합니다. 부모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22절을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사람은 출교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모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3)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말세에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을 미리 나타내 줍니다. 그래서 마 10:28절에서 주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부모로부터도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유대인들은 24절에서 다시 그에게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가 죄인이다’ 라는 자신들의 생각에 동조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강요해서라도 동의를 얻어 내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다음 달 7 월부터 요한계시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보이는 태도가 바로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때 가서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주인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나에게 믿음을 버리고 사탄을 따르게 강요당하는 날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먼저 이 사람의 모습부터 25절에서 보려고 합니다.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절에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상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증거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앙이 자신에게는 너무 이상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경이었다가 예수로 말미암아 보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게다가 소경을 고치는 일을 보면 예수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암시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31절에서는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어 죄인이라고 바리새인들은 말하는데, 만약 그가 진짜 죄인이라면 하나님은 그런 기적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적을 예수에게 허락하였기에 예수는 분명 죄인이 아닌 경건한 사람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침을 받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발전입니다. 11절에서 이 사람은 단지 예수를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 다음 17절에서는 능력 있는 선지자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31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성숙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33절에서는 예수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까지 고백합니다. 참 부럽기까지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내면 깊이 깔려있는 의도까지 파악하며 용기 있게 예수를 변증합니다. 결국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대처하다 34절의 “쫓아내어 보낸다”는 말을 보면 실제 출교를 당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을 보기 바랍니다. 사실 평생 동안 앞을 못 본 사람이 눈을 뜨게 되었다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면 끝날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가장 인간적인 태도조차도 취하지 않습니다. 슬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함께 기뻐하는 것조차 상실해 버린 회칠한 무덤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을 고쳐준 진실 하나 때문에 의리도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다가와 치유해 줄 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던 주님의 손길을 기억했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목소리를 잊지 못했습니다. 눈 뜬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가려는 권위 앞에 저항했습니다.    

 

이 정도면 멋진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정말 칭찬해줄 만합니다. 아니 완벽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도 과연 그럴까요? 그가 칭찬 못 받을 사람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서 나타내고자 하는 일이 이 정도에서 마쳐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만족하셨다면 요한복음 9장은 34절에서 마무리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5절이 이어집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그를 출교시켰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만납니다. ‘만나다’는 동사는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찾아가 만났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너는 인자를 믿느냐”고 묻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36절에서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한다’고 대답합니다. 자신의 눈을 고쳐준 분이 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음성은 기억하지만, 보지 못했기에 예수님과 인자를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37절에서 ‘인자’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자신임을 밝힙니다. 38절에서 그의 반응을 순서대로 보기 바랍니다. 먼저 자신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 절하며 경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를 때 그 영혼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찾아가 나타내십니다. 육신의 병 고침이라는 수준에 우리를 머물게 내 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도록, 마지막까지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어려움을 가진 우리들에게 먼저 다가오시며 은혜를 보여 주십니다. 또한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통해 능력의 하나님임을 나타내시며 믿어 구원에 이르기까지 하십니다. 단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영적 죽음으로부터 해방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 또한 나타내 보이십니다.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함으로 진정 경배 받기에 합당한 분임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난제를 가진 나에게 주권적을 다가오는 주님이 되도록, ‘내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올려 드리는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