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6): 내 배에서 생수가 흐르게 하십니다 

7:37-44

 

 

오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지만 녹색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요즘 다들 산책도 많이 하실 텐데요. 나무 잎들이 옅은 녹색으로 변해서 숲에 들어가면 눈의 피로도 줄여주고 마음도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변화에는 봄 비가 상당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대지에 내렸던 비가 땅을 적시고 뿌리를 통해 나무로 올라갑니다. 생명을 싹트게 만들고 잎이 나오고 자신의 색을 만들며 자라게 합니다. 물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의 문명들도 대부분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큰 도시들은 강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태어난 에덴동산도 창 2:10절을 보면 강이 있었던 곳으로 소개됩니다. 그만큼 물은 인간의 모든 삶과 생활에 있어 소중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유대 땅은 물이 귀했습니다.  

 

이들이 살아갈 방법은 비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우기에 비가 내리면 큰 구덩이를 파서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은 내리는 이슬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주변은 해발 800m가 넘지만 동쪽에 기드론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곳에 기혼 샘으로부터 물을 공급할 수 있기에 성을 쌓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7:38절을 보면 그것도 생수의 강을 언급합니다. 이 말씀을 하고 있는 배경은 여전히 요7:2절에서 언급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초막에 거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 23:40절에서 언급된 초막절의 행사가 어떻게 진행 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합니다. 8일 동안 진행되는데 7일 동안 동이 틀 때 제사장들이 실로암으로 가서 물을 떠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물을 성전 앞의 제단(바위)에 붓게 됩니다. 이것은 장래에 비를 충족히 내려 줄 것을 간구하는 예식이기도 했습니다.

 

,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조상들에게 물을 공급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동시에 물이 반석에서 흘러 나온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정을 마친 초막절 마지막 날인 8일째는 물을 붓는 의식은 하지 않고, 다만 비를 내려 달라는 기도만 올렸다고 합니다. 바로 그날이 요7:37절의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해당되는 날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붓던 물을 멈추는 날에, 예수님은 뭔가 의도를 가지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십니다. 말씀을 살펴 보면 1)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초청하는 대상을 특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정해두고 오라고 했다면 우리는 목마름을 해소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이 땅 사람들의 피부색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갑과 을, 가난하고 부하고, 학식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아무나 와서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라는 주님의 초청인 것입니다.

 

2) 어떤 목마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목마름입니다. 물질적 부족인지, 정신적 공허함인지, 영적 혼돈인지 사실 이것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인생의 모든 문제라고 보아도 무관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참 좋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문제든지 가지고 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내게로 오라는 확신을 들려 주십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풀어줄 능력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찾아 갔는데 문제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더구나 해결해 줄 능력조차도 없다면 실망하고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문제이든 해답을 갖고 있으니 무조건 오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주님이 서서 외치는 것은 사실 겔 47:1-12에서 예언된 말씀이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각처의 생물은 물론 사람들도 다시 소생할 것이라는 생명 회복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눈에 보이는 옛 성전을 대체하는 새 성전임을 지금 선포하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의 초막절 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이 광야에서 물을 낸

그 반석의 실체임을 확실히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적 생수 되심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초막절 의식과 관련하여 이제는 생수 되는 예수님 자신에게로 나아오도록 초청하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요한은 37절에서 네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가 예수를믿는 것임을 알 수 있도록 바로 38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으로 연결시켜 주어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 말을 참 많이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으신지요?

 

이제 예수님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7:40절에서 사람들의 첫째 반응은 예수님을 신 18:15절에서 예언된 선지자 중의 하나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단지 이적을 행하는 능력 있는 선지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언제든지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나타나면 자신의 필요 때문에 예수를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내가 믿고 따르는 신앙의 대상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그 믿는 대상을 만날 때까지 간직하는 소중한 확신입니다.

 

단지 능력을 가졌다고만 해서 메시야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사람이 갖지 못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신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계13:2절에서,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장차 나타날 첫 번째 짐승) 준다고 합니다

 

의 정체는 계12:9절에 의하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13:13절에서는 심지어 장차 나타날 또 다른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하는 능력도 가지게 됩니다.

 

사탄은 말세에 어떤 특정 사람(인칭대명사)에게 능력을 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모든 것도 하나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악은 언젠가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13:14절에, 짐승은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여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미혹하고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께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를 마음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행위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세에 이런 능력을 가진 짐승에 미혹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까지 말해줍니다. 믿는 자가 앞으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능력에만 쏠리면 제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는 부자가 되고 명예를 누리고 질병을 낫고자 아닙니다. 더 나은 것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것을 만족하며, 먼 훗날 주를 만날 때 내 눈물을 없애주실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예수만 붙잡고 가혹한 현실을 살아내는 능력입니다

 

7:41 상반절에서 사람들의 두 번째 반응을 보면 예수가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앞에 사람들 보다 바르고 진전된 모습입니다. 하지만 생각일 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속죄양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갖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런 부류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야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떠나갔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전혀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들이 가진 관심과는 무관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들은 세상의 정의와 불공정에 대해서만 예수를 필요로 할 뿐, 죄의 문제와 구원의 세계에는 눈 뜨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대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만세 전부터 구원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해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른 세 번째 사람들의 반응을 7:41 하반절에서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에서 자라고 활동하고 갈릴리 방언을 사용했기에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이 태어날 때 동방박사들이 왕궁을 찾아왔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가들은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따르지 못하게까지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프레임 전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7:42절을 보면 이들은 성경을 인용합니다. 5:2절을 말했겠지요. 그러면서 분명히 성경에 이르기를 다윗의 씨로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프레임을 만들어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들의 정체는 요 7:44절에 의하면 예수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요7:45절에서는 바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음을 요한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만든 프레임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을 요7:43절은 논쟁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3) 믿는다는 것은 논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믿느냐 안 믿느냐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깨닫게 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과 자연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 또는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고 알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간이 되어 실제로 나타나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언제든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고 깨닫고 믿도록 하기 위해 성경을 우리에게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수많은 설교자와 전도자와 증인들이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믿지 못하겠다는 변명이 없게 했습니다. 믿기를 거부하려는 사람들의 논쟁보다 예수를 알기 원하는 질문이 우리 가운데 더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네 번째의 반응의 주인공은 7:50절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를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자, 그들은 공회원 가운데 믿는 자들을 있다면 저주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때 니고데모는 그들 가운데서 고소된 사람에게 자기 변호 기회를 주지 않고 판단할 수 있느냐고 부당성을 지적합니다.

 

약간 예수를 변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분명한 신앙고백은 아닙니다. 조심스럽고 냉철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근거로 합리적인 법 절차를 현장에서 이끌어 낼 뿐입니다. 요한은 이런 니고데모의 모습을 요 7:50절 상반절에서 제자들 중의 하나가 아닌 그 중의 한 사람즉 바리새인 중에서 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물론 믿는지 여부를 하나님만 판단하시지만 우리로서는 좀 애매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믿고 있는 것을 입술로 명백하게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례자나 입교자들에게 자신의 고백을 성도들 앞에서 나누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7:38절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서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해 줍니다. 그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 복수)이 흘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7:39절에서 우리 배에서 흘러 넘치는 생수의 강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예수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말해줍니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에 그 속에서(공동), 그 마음속에서(현대인의 성경) 로 번역합니다. 여기까지 요한이 말한 것을 정리해보면, 예수를 믿을 때 믿는 그 사람의 심령 깊은 곳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빼고서는 상상조차도 못하는 것임을 명백하게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5)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성령의 내재를 의미합니다. 내 심령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이런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고 난 뒤부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회개가 날마다 일어납니다. 감사가 드려집니다. 예배자로 나아옵니다.

 

또한 예수 믿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예수를 알기 전과 후의 삶이 너무나 차이가 있어, 변화된 나의 삶을 간증합니다. 다들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한 가지 더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내 심령 가운데서 생수의 강이 계속적으로 흘러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를 신앙생활에서 이어가느냐는 질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고 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영적 갈증이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감격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없습니다. 감동은 너무 오래 전의 것이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요한은 나중 에베소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 역시 목회를 하면서 같은 문제에 부딪혔던 것 같습니다. 믿는 자에게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과 성도들의 실제 삶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누리지 못하는 문제를 사람들로부터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괴리를 놓고 목회자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7:37절과 38절은 그 답을 제시합니다. ‘마셔라그리고 믿는다의 두 동사를 보기 바랍니다. 마시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동사가 전부 현재형을 사용합니다. 한 번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것을 한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 내 입에서 나왔던 믿음의 고백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생수의 강이 내게서 계속 흐르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처음 믿을 때 했던 일회적인 신앙고백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믿음과 감격과 사랑으로 드렸던 그때의 고백을 매일 드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매일 다가오는 오늘을 처음 믿었던 그 날처럼 맞이하면 됩니다. 저도 사람이기에 감정의 굴곡도 있고, 시험에 들기도 하고,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믿는 성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연히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나아가야겠지요. 안 했다면 해야겠지만 성도가 기본적으로 이런 것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고 있는 것을 다시 점검 하는 것이 좋습니다. 팬데믹을 보내면서 신앙생활이 힘들고, 냉랭한 신앙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분들이 있으시지요?

 

그런 분들은 구원에 관한 것, 십자가의 사랑의 설교를 듣거나, 성경 말씀 중에도 로마서나 요한복음 등을 읽기를 바랍니다. 한 일주일 정도 기간을 정해두고 읽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체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도 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녹음해서 한 번 들어보기 바랍니다. 세상의 불의와 이 땅의 정의를 말하고, 이웃 사랑을 말하지만, 내 기도 속에 구원과 나를 하나님 자녀 삼아주신 감격의 고백이 빠져 있는지를 확인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위험수준에 도달하거나 이미 누군가에게 성령의 감동이 없어라고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매일 나의 기도 가운데 처음 믿을 때 내가 했던 죄에 대한 회개와 십자가의 감격을 쏟아내고 있는지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정말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지 체크해 보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감동이 없다고는 말 하는데, 정작 주님께는 달라고는 안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즉 성령을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현재형으로 드리지 못하는 신앙은 생수의 강이 멈추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나오는데 뭔가 허전하고, 나의 신앙생활은 헛바퀴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생수 없이 하루를 버티기 힘들듯이 내 속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성도는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내 모든 삶을 맡겼던 나의 첫 믿음과 나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셨던 구원의 감격의 고백을 날마다 다시 올려 드리기 바랍니다. 이제 팬데믹을 청산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모든 성도들에게 다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성령의 역사가 회복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