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5): 보내신 이의 뜻과 때를 아신 분 

7:14-18

 


오월에 들어오면서 가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일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늘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아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름대로 많은 답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그 답들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매년 반복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생일이 있습니다.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끊임없이 다가 옵니다. 각 민족들은 고유의 명절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 등의 절기가 있습니다. 삼대 절기 때면 반드시 유대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물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 2:13절이나 5:1을 보면 예수님도 유월절이나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요 7:2절을 보면 초막절을 배경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 7:8절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직이라는 말로 보아 조금 뒤에 올라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7:1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하지 아니함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대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곳에는 종교지도자들과 공회가 있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역은 주로 북부지역인 갈릴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언뜻 주님은 겁쟁이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요 7:14절을 보면, 명절의 중간이 되어 성전에 올라가셨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므로 일단 예수님은 겁쟁이라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 7:10절을 보면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겁쟁이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이유를 다시 묻게 됩니다. 그 이유를 요 7:6, 8에서 보면, 자신의 때가 아니므로 올라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주님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다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사실 이런 것들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주님은 자신의 때를 알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부럽습니다. 게다가 요 7:30을 보면 사람들이 축제 중에 예수를 잡으려고 했지만 아무도 손을 대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라는 의미는 주님이 배신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후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려면 다음 봄에 오는 마지막 유월절까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은 때를 알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조용히 숨길 수 있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아들인 신적 능력 때문에 당연히 가능했겠지요라고 대답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잘 알지 못합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이 가진 동일한 신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반대로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똑 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신적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벧후 1:3절을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은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벧후 1:4절에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해 줍니다.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여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에 죄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없었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이제 임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8:26-27절은 성령이 우리 속에서 하는 일을 잘 말씀해 줍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란 1)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요구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 줄 수가 없습니다. 소통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응답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하나님께 구하게 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1 방법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14: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을 약속합니다. 또한 요16:13절에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할 것도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내게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들을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방법은 찬양가운데,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읽다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친숙함입니다. 성경 말씀이 생소한데 어떻게 나에게 하시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몇 주 전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생소한 번호라 안 받으려고 하다가 받았습니다. 잘 아는 분이긴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기에 목소리 조차도 쉽게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이 나를 위해 탄식하며 간구할 때, 나는 어떻게 그것을 잘 들을 수 있을까요? 성령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시간 속으로 자주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소리를 쉽게 알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언제, 몇 시에 기도할까요? 아는 분 계십니까? 살전 5:17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성령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께 늘 기도 한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늘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친숙해지라는 의미입니다.  

 

22:39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모범을 보이기 위해 습관처럼 감람 산에 가셔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기도 습관은 막1:35절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에 기도했다고 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새벽은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늘 하는 것이지만 하루를 시작하면서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 모든 것에 앞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장소는 한적한 곳인(1:35) 불특정 지역도 있지만, 주로 정해진 곳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다 지역에서는 감람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역 지역이 어느 곳이든지 상관없이 매일 새벽기도는 주님의 일상의 습관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따랐던 유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3시 오전 9, 6시 정오, 9시 오후 3시로 세 번입니다. 아침 기도시간이 오전 9시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깨뜨려 버립니다. 21:38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른 아침은 말 그대로 새벽입니다. 영어성경 대부분(NIV, KJV, NASB) ‘early in the morn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습관을 알고 주를 따르던 사람들은 주님께로 새벽부터 나아갔던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강조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 새벽에 하나님과 교통하기 바랍니다. 만약 아침에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 기도하십니까?

 

물론 언제든지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에서 깬 새벽에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에 엄청나게 새벽에 기도의 응답이 있다는 절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잠에서 깬 순간 기도를 안 하면 여러분이 다음 기도하는 시간까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은 그분의 하루 일과인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는 많은 사역을 감당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잠이 깬 새벽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것을 배우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일어난 첫 시간인 아침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듯이 주님은 장소를 정하여 두고 일어나자 마자 습관적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교회이든, 집이든, 자동차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공간이 있느냐, 그리고 가장 먼저 나의 시간을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대부분은 아니지만 간혹 특별한 일을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일어나는 시간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분들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도 주님께 드리는 첫 시간은 시간상으로는 새벽은 아닙니다. 하지만 첫 시간이라는 의미는 같을 것입니다.

 

성도가 새벽기도를 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전도를 통해 새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예수를 믿는 사람도 훈련이 필요하지만 우리 자녀들도 포함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예배 장소도 중요하지만 기도하는 장소 역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만 아니라 자녀들도 성령의 음성을 듣는 기도의 삶이 되도록 훈련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처럼, 다음 세대들인 우리 청년들과 자녀들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훈련은 필요합니다.  

 

청년들 중에는 학교에 있을 때는 말씀도 기도도 하곤 했는데, 졸업하고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잘 안 되고, 심지어 전혀 안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은 어떠신지요? 매일 주님과 갖는 시간이 있는지요? 그리고 드리기로 약속한 시간을 지키고 있는지요? 성경읽기 결심하고 읽으면서 체질화 되어 있는지요? 잘 하시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아직 습관처럼 자리잡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습관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성경읽기나 성경암송 그리고 기도회, 성경공부들에 나를 조인시켜 꾸준히 함께 해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5월에 일독 팀이 마무리가 되고 8월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못 읽은 분들은 방학 동안 마무리 하시고 다른 분들은 그때 새롭게 조인해서 함께 나아가기를 도전 드립니다. 

 

그렇다면 왜 평생 성도의 훈련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만 살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가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은 백 년으로 끝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영원히 예배를 드리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위해 이 세상에서 잘 훈련 받는 것입니다. 

 

누가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매일 기도하고, 성경 읽기가 습관이 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특별한 성경읽기나 기도 모임에 조인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그 분도 함께 조인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된 사람을 이끌어 주어야 할 책임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사나 장로 집사의 직분을 떠나서 영적 리더들입니다.

 

영적 리더가 앞서 끌어주지 않으면 누가 따라오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누구도 예외 없이 훈련이 필요합니다. 시험에 무너지기 않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는 지혜로운 방법은 교회가 하고 있는 훈련에 나를 묶어 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 훈련되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찾기가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2 방법은 훈련의 삶에 동참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그 순간이 오기까지(죽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이어가기를 도전 드립니다. 매일 아침마다 모든 성도들에게 카톡으로 보내드리는 성경구절 한 말씀부터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뜻만 이야기했지만 요 7:8절은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하나님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는 하나님만이 주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말씀할 때 나는 명절에 올라가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3 방법은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무조건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말처럼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잠잠하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외부적 환경이라는 파도가 일어나는 것 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더 요동 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하게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고 선하게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뿐입니다.

 

이제 오늘 읽은 본문 요 7:17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법을 묵상하려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라고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4 방법은 내 생각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 가운데 내 마음속에 생기는 생각이 성경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면 됩니다. 그런데 종종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미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에게 희생이나 손해가 가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요 7:18절은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않고 자기의 영광만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안다고 남들에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만 붙잡고 따지려고만 하고 있는 것이지요. 힘들고 희생을 요구하더라도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뜻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5 방법은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연구하고 토론하는 대상이 아니라 따르고 실천해야 할 것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꿰뚫어 보는 직관력과, 많은 자료들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지적 능력과 나의 많은 경험을 말씀의 권위 앞에 다 내려 놓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무궁하고 광대한 뜻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도 모르겠다고 생각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손해만 보고, 희생만 당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이라도, 아니면 중간에도, 또 나중에라도 그분의 뜻을 보여주실 것이라 믿고 기도하고 지혜로운 판단이다라고 생각되는 것을 붙잡고 나아가는 도전이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와 뜻을 알기 원하는 성도들 위에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