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4): 효자   

19:25-27

 


가정의 달을 맞아 자녀들과 부모님들을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가족이 먹어야 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는 어버이 주일을 맞아 예수님은 어떻게 부모를 섬겼는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주님은 부모님들에게 어떤 아들인가라는 것이 참 궁금해 집니다.

 

주님은 효자였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주 동안 주님의 부모님 사랑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주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셨을까요?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며 병자들을 고치는 바쁜 일상 속에서 가족들에 대해 사랑을 나눌 시간이라도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물론 동생들도 있었구요. 평범한 가정에서 나서 성장했습니다. 공생에 이전에 주님은 부모님들에게 대해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12살 이후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약 18년간의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 기록을 찾기가 힘듭니다. 

 

2:42절 이후를 보면 열 두 살 정도에 부모가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린 후 찾는 일이 있었습니다. 2:49절에 의하면 그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부모들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눅 2:51절을 보면 그 일 후 예수님은 나사렛 집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살면서 순종하여 받들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어쩌면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생활을 요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 51절 번역은 원문에서 그들에게라는 인칭대명사가 생략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순종대상은 친 부모였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게다가 순종하며 받들다라는 이 동사는 순종하는 상태가 계속 되는 습관을 나타냅니다.

 

일시적이거나 선별적인 순종이 아닌 지속적인 부모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이지요. 비록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육신의 부모에 대한 복종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나사렛이라는 한 동네의 가난한 가정에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보냈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목수일도 배웠겠지요. 한 가지 사실은 아버지 요셉은 주님이 12살 정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 후에 일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공생애 전에 별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연히 아버지의 죽음으로 맏아들로서 어머니와 동생들의 가족 부양의 책임을 맡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이전의 성장 모습은 눅2:52절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가더라는 한 구절이 보여줍니다. 이 구절을 통해 볼 때,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주님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와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에서도 균형 있게 성장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공생애 이후의 시간일 것입니다. 주님은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집을 떠나 혼자 거하는 모습을 요1:39절은 보여줍니다. 한번은 가족들이 찾아옵니다. 3:35절을 보면, 그때 주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여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매우 섭섭한 말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가족들에게 벼락과 같은 소식이 전달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잡혀서 대제사장의 집에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18:16절에 의하면 제자 중 하나인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라 베드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집 안에 조차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온통 피투성이인 아들을 처다만 보아야 했습니다. 생명이 떠나기 전, 그것도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이 세상의 불효자 중의 불효자일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어가는 아들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 더 십자가 밑으로 다가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더 가까이 오자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아들의 처참한 모습은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더 찔렀을 것입니다. 이미 로마병정들이 겉옷과 심지어 속옷까지 다 취하여 아들을 위해 남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 밑의 여인들에 대해 3명으로 말하는 마27:56절과 막15:40절과는 달리 요한은 19:25절에서 한 명을 더 추가하여 4명으로 기록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갈릴리로부터 온 세 명의 여인들과 함께 아들의 십자가 밑에까지 왔다는 사실을 더 상세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거칠게 내 쉬는 아들의 숨소리에, 마리아는 자신이 그 아픔을 대신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못 박은 자리에서 흘러 내리는 피를 닦아 주려고 해도 더 아플 것 같아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아들의 고통을 눈 앞에서 고스란히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오열하며 흘러내리는 여인들의 눈물만이 있었습니다. 

 

이때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던 아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19:26절을 보면 주님은 자기의 어머니와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먼저 말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곁에 서 있기는 했지만, 숨조차 쉬는 것도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에게 말조차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건네온 말로 마리아는 너무나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들 경험해보았겠지만, 너무 아프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극렬한 고통 가운데도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효도가 무엇일까요? #1)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부모를 위로하려고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위로하려는 주님은 분명 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자여라는 말을 주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자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는 때를 정하는 순간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인류 구원의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또 한 번 더 사용하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자신을 육신의 아들로만 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이라는 정이나 연민이 아닌 메시야로서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라는 뜻이 담겨 있는 소중한 한 마디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마리아에게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리키며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13:55절을 보면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 아들 네 명이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주님은 다른 동생들이 어머니를 잘 공경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밑에는 어머니 외에도 다른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이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19:27절에서 주님은 요한에게 마리아가 네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같은 혈육을 가진 자매인 이모에게도 어머니를 부탁할 만합니다. 그런데 왜 제자 요한에게 부탁을 했을까요?

 

7:5절에 근거하면 형제들이 아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아마도 막 3:35절에서 말씀하셨던,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라는 말씀을 주님이 직접 하셨기에 이제 그 말에 대한 적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현실적으로 당시 가족을 부양하는 자는 남자들의 몫임을 감안하면 여인들에게 부탁하기란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 만만했던 베드로 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한이 주님의 친척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요한 한 사람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유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을 우리는 보아야겠지요. 죽어가는 순간에도 주님은 요한에게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자녀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2)효도는 부모님을 마지막까지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보살펴 드리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마지막까지 육신의 부모님의 신변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물질이 부족한 부모님들에게는 물질로 도와 드려야 합니다. 물질이 부족하지 않으신 분일지라도 나이 들어가면서 심적으로 불편하지 않도록 위로해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시고, 또한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역시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명령합니다. 이웃사랑에 관한 것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주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 않으면 안될 온 인류를 구원할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는 최선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대한 효도가 소홀하게 해도 된다는 면책이 부여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까마귀가 있습니다. 흉조로 알려져 있지만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어미 새가 늙으면 먹을 것을 물어와 소화가 잘 되도록 위에 넣어 불려서 입에 넣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효도하는 새)라고 불렀고 까마귀의 극진한 효도를 반포지효’(먹이를 물어다 어미 입에 넣어준다)라고 부릅니다. 

 

딤전 5:8절을 보면 바울 사도 역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당위성입니다. 사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주어진 명령이기에 시간이 가도 모든 세대들이 지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엡 6:2-3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분명 이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대로 행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탁이 있은 후 제자 요한은 마리아를 바로 자기 집에 모시게 됩니다. 거처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정성을 다해 모시게 됩니다. 나중 요한이 목회를 하기 시작한 에베소까지 함께 가서 마리아는 그곳에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이후 요한은 장수하며 로마의 박해 속에서 초대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 서게 됩니다. 

 

이제 요한을 통해 가족과 부모에 대한 효도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요한이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모시고 섬기는 모습에서 주 안에서 새로운 가족 개념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믿는 성도들은 혈족보다 더 큰 가족의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믿음의 가족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성도들의 #3)효도에 관한 의미입니다. 그들이 나의 친부모가 아니라도 주 안에서 나의 부모님처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들을 존중해 드려야 합니다. 친 자식이 아니라도 건강을 잃고 쇠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의에 빠져 있는 어른들에게 기쁨을 드려야 합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슬픔에 빠져있는 어른들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아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요한은 주님께로 받은 사랑을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섬겼습니다.

 

주를 믿는 우리 역시 십자가 아래에서 새로운 가족으로 묶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의 보혈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만들어 집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혈육을 떠나 예수 안에서 모두가 나의 형제요 자매요 내 부모님들입니다. 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가족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경험하지 못하는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섬기고 돌보는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어 냅니다. 각자 삶의 배경도 다르지만 이해하는 가족들입니다. 힘들 때 격려하며 서로 세워줍니다. 세상은 행복한 가정을 부러워하듯이 새로운 가족들로 구성된 교회를 분명히 부러워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친교를 나누고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힘든 일이 생기면 내일처럼 여기며 위로를 아끼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찾아가 기도해 줍니다. 기쁜 일, 슬픈 일, 힘든 일, 모든 것을 나누며 함께 웃고 슬퍼합니다.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피도 안 섞인 우리가 그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 낸 가족이라는 개념과 부모에 대한 효도가 이 시대를 살릴 수 있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다시 칭찬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참 많이 변했습니다. 다들 자신의 가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가정의 무게중심이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부모님들을 공경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동의 할 것입니다. 음식을 만들어 아들 집 찾아오는 것 보다 택배로 보내기를 더 좋아합니다. 사회는 점점 고령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자녀들의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우리 부모님들에게 쏟아야 하는 필요가 늘고 있다는 뜻입니다. 

 

조선일보에(2020,10. 10) 따르면, 2016년 이후 한국에서 65세 홀몸인 나이 드신 분의 수가 매년 7만 명씩 가파르게 증가한다고 합니다. 이에 따른 고독사도 빠르게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독사는 아직 통계조차 없고 무연고 사망자 수에 추정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시대적 요구 속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구성원들이 젊다고 해서 우리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더구나 코로나 19 팬데믹의 장기화로 홀몸이신 나이 드신 분들이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면 접촉이 점점 줄어 들어가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더 몸으로 실천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차별화된 공동체로 교회가 다시 거듭나야 하는 시대적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너무나 세상으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잃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교회가 세상의 질타와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까? 교회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먼저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이미 상실한 것은 점차 회복해 나가야 되겠지요. 그와 동시에 함께 새롭게 해 나갈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모님들에 대한 효도를 이끌어 낼 때 다시 세상을 리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할 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가 따르는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까지 효도하는 본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만들어 주시며 더 많은 새로운 우리 부모님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며 섬기고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모님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고 그분들의 살아온 삶을 존중하며 마지막까지 그들의 필요를 채워 드리는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진정으로 실천하고 효도하는 아름다운 덕을 세워 나간다면, 세상은 우리를 부러워하며 다시 존중하며 교회로부터 배우러 할 것입니다. 요한처럼 우리에게는 십자가 밑에서 만나 섬겨야 할 주 안에서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우리 부모님들에게 효를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