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3): 생명의 떡   

6:34-35

 


벌써 오월에 접어 들었습니다. 자녀들과 부모님을 생각하고 가족들을 생각하는 시간들이 많아 지게 됩니다. 먼저 첫 주일은 어린이주일로 자녀들을 챙겨 보는데요.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희망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미래가 만들어져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민자로 또는 유학생으로 자녀를 낳고 키우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이곳에서 적응하고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도록 하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경 쓸 것들이 더 많아집니다.

 

요즘처럼 한류가 대세인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에 1위를 하는 가수들이 나오고, 영화에서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는 배우도 나옵니다. 전에 없었던 이런 주위 변화들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키워주고 싶습니다. 한국 말, , 역사, 문화에 대한 관심도 커가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키우다 보면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바로 먹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먹는 것은 인류가 생겨난 이후로 지금까지 늘 관심거리이기도 합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다들 오늘은 뭐 먹냐고 묻는 것만 보아도 참 우리의 관심사는 먹는 것에 많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팬데믹으로 부모들은 아이들 먹는 것 더 챙기게 되고, 운동량도 줄어드는 이때 다들 건강하도록 먹는 것에 더 관심을 쏟습니다. 이것은 키 크게 만들고, 이를 튼튼히 하고, 저것은 머리를 좋게 만들고 등등 몇 가지씩은 다 알고 아이들에게 먹이려고들 해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을 먹여야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늘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먹을 것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배경을 요한은 요6:4절에서 들려 주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러다 보니 먹을 것이 이슈로 떠 올랐습니다. 그때 주님은 질문 하나를 제자에게 던집니다. 6:5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6:6절을 보면, 이 질문은 빌립을 시험하려고 의도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발적인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주님이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을 시험하셨다면, 우리들에게도 불어 보실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 부모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면, 너희 자녀들에게 무엇을 먹여야겠느냐?’ 는 질문으로 들려 옵니다. 우리 자녀들이 먹고 싶어서 달라고 하는 모든 필요들을 직시하라는 도전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대부분 부모들은 영양이 풍부하고 맛있는 것을 자녀들에게 먹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구한 것으로 사람들의 배를 부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6:27 상반절에서 이것을  썩을 양식이라 부릅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배만 채워생명을 이어가게 하지만, 그것을 먹는다고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양식을 6:27절 중반절에서 하나 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라 부릅니다. 공동번역은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으로 번역합니다. 6:27 하반절을 보면 이것은 인자만이, 오직 예수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먹으면 그날은 살지만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죽음을 너머 살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인간에게 먹으면 죽지 않는 양식이 있다는 새로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엄청 좋은 뉴스입니다. 모두가 갖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것도 공짜라고 하니 다투어 가서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6:32절을 보면, 요한은 이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주신 참 떡이라고 말합니다. 이 양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공급원을 말해 줍니다. 6:33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이 양식을 주는 하나님의 목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전에 모세 때도 하늘에서 내린 떡이 있었습니다. 만나가 내려와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먹어도 배고픈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배를 채우는 것 외에 뭔가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떡은 인간의 영원한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십니다. ‘생명을 준다첫째 의미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죄에 대해 해결책이 되어 준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실수든 고의든 반복되는 죄로 고민하고 죄책감속에 시달립니다. 이런 우리들일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의 보혈로 용서 받습니다. 만약 죄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 쌓인다면 정말 괴롭고 힘들지 않겠습니까? 성도에게만 있는 회개와 용서의 삶은 세상이 보아도 부럽고,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생명의 비결입니다.

 

두 번째 생명을 준다는 의미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복되는 죄짓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주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로 만드시고 새 생명인 예수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33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떡은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하자마자 요6:34절에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하는 갈릴리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바랍니다. 4:15절에서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했던 사마리아 우물가의 한 여인과 너무나도 비슷한 모습을 또 한번 보게 됩니다.  

 

물을 달라고 하는 여인에게 주님 자신이 바로 생수로 소개했듯이, 6:35절은 주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라고 소개합니다. 생수가 영원한 인간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듯이, 이제 생명의 떡은 인간의 배고픔을 완전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35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배고픔과 갈증의 해소 조건은 주님께로 와야 주리지 않고, 예수를 믿어야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는 것과 믿는 것을 40절에서는 아들을 보고 믿든 자로 그리고 그 결과는 영생이라고 말해줍니다. 이것이 생명을 얻는다는 세 번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갈증과 배고픔의 해소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간단한 방법은 죽는 순간 살면 되지요. 이것을 40절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방법은 마지막 날에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는 부활임을 선포해 주십니다. 환생도 윤회도 아닌 부활이 예수 안에 있기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6:51절 상반절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것은 주님의 성육신을 의미합니다. 2) ‘사람이 이 떡을 먹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결정적인 순간을 나타냅니다.

 

3) ‘영생하리라는 말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부활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있는데 죽음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51절 하반절을 보기 바랍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는 말씀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란 말은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대신 주신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줄 떡은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몸이며 예수님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8절에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 줌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요6:53-55절에서 참된 양식인(55) 주님의 살을 먹고(53), 참된 음료인(55) 주님의 피를 마셔야만(53) 우리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수 있다고(54)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종교적 식인습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것이며 영적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각적으로만 바라보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말씀이긴 합니다. 그러나 먹고 마심은 생명이 유지되는 기초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먹고 마심의 교제는 요6:56절에서처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는 그리스도와 가질 수 있는 내적이고 친밀한 교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얻는 다는 네 번째 의미이기도 합니다.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혁명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를 먹지 말라고 구약은 금했습니다. 사람의 살을 먹는 것은 시 27:2절 같은 곳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교회가 성찬을(Holy Communion) 통해 주님의 살과 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어떤 종교도 감히 창시자의 살과 피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고 흉내 내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믿음입니다. 떡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양식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이 생명의 떡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를 순서적으로 정리해보면 1) 죄 용서함입니다.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순간 요5:24 하반절 처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거듭난 삶입니다. 사망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3) 지금까지 없었던 주 안에서 친밀한 교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4) 영생을 의미 합니다. 내게 주어진 목숨이 다하는 순간 죽음의 문을 통과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에는 생명을 가진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다른 혜택은 없나요? 남은 시간에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바로 앞에 사건 하나를 보고자 합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고 제자들만이 갈리리 호수를 건너는 모습입니다.

 

6:17절은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 땅에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 주님 없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제자들의 모습에 나타나는 배경들을 보기 바랍니다.

 

요한은 6:16에서 저물매, 17절에는 어두웠고, 18절에는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갈릴리는 호수지만 너무 커서 바다로 표현합니다. 세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갈리리 호수처럼 세상은 갑자기 돌풍이 불어 배를 뒤집어 놓습니다.

 

사람은 세상 가운데서 돈과 명예라는 조그마한 배에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보아도 졸업 못하면, 논문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돈 벌지 못하면 어떻게 살지? 직장 없으면 어쩌나? 그것 잃으면 또 어떻게 살지? 내 건강 잃어버리면 어쩌나?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고 두렵게 합니까?

 

방향을 잡고 가더라도 갑자기 불어 닥치는 환난과 재난의 파도 속에 얼마나 노심초사 하며 살아갑니까? 때로는 파도에 건강도 잃습니다. 재산도 다 빠져 들어갑니다. 생명조차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늘 불안 속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내 인생의 위험과 혼돈 가운데 찾아와 주십니다.  

 

첫째 혜택은 인생이라는 위기에서 해결자 되는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여전히 두려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내니 두려워하기를 멈추라라는 말로 위로를 받습니다. 셋째 혜택은 주님이 내게 오는 순간 또 하나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6:21절에 의하면 그들은 목적지에 안전하게 이른 것입니다.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당연히 이 땅에서 이루어낼 목표를 이룬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경험하는 그 땅에 이름을 말합니다. 이 땅을 넘어 하늘 나라까지 도달하며, 죽음너머의 천국을 의미합니다.

 

오늘 입교(confirmation)한 자녀들이 너무 예쁘고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자녀들도 우리가 이미 먹었던 생명의 떡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네 번째 혜택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와 같이 자녀들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결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삶의 문제로부터 탈출이나 고난의 해결, 질병의 치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해했다면 복음을 잘 못 이해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살아가는 성도일지라도 갈등 속에 살아야 합니다. 실패를 경험합니다.

 

비록 그런 상황가운데 있을지라도 생명의 떡을 먹은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내는 힘을 가집니다. 이것이 주님만이 줄 수 있는 생명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보며 문제를 직시합니다. 그 속에서도 입술의 찬양과 예배를 통해 누리는 평강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삶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뛰어난 것을 예수가 주신다고 믿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놀라게 만듭니다. 또한 생명의 떡을 먹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 세상을 이미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챙깁니다.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생명의 떡을 먹입니다. 참된 양식인 하늘로부터 내려온 예수의 피와 살을 먹입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떡인 예수를 나의 자녀들이 확실히 믿고 있는지 살펴 보는 지혜로운 부모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래야 어둡고 혼돈 가운데 있는 세상을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습니다. 죽을 것같이 몰아치는 파도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떠날지라도 반드시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에 그들도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