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2): 절망의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5:2-8

 



일년이상 지나가는 팬데믹이 많은 것들을 변화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비대면이 너무 일상화 되어 있습니다. 괜히 대면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팬데믹으로 사람들과 만남이 줄어 들었습니다. 직장생활도 집에서 한때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학교 수업도 다들 제한된 만남들 속에서 진행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공동체 중심보다 개인이 신앙을 유지해 가야만 하는 형편입니다. 그래도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적응하며 지내 오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만남이 줄어 들다 보니 사람이 그립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함께 해줌으로 느꼈던 인간적인 ‘정’도 그립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함께 하던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소수의 인원으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왠지 내가 하는 일이 잘 안 풀려도 더 어렵게만 느껴지고 마음도 우울해 지기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조금은 비슷해 보입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성 안에 아픈 병자들이 모여 있던 장소가 있었습니다. 2절에 의하면 그 장소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쌍둥이 연못과 행각의 흔적이 발견되어서 그 존재 차체가 확인이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연못은 사람들이 양떼를 몰고 지나다니던 예루살렘 북동쪽 성벽에 위치한 양문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 외곽으로 흐르는 기드론 계곡물과 빗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연못이었습니다. 이 연못은 원래 성전에서 사용되던 제물을 씻기도 하고, 제사장들의 피 묻은 옷을 세탁하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점차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는데요. 초등학교 친구가 사는 동네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천둥 치는 날 산에 벼락 맞은 나무를 가져다 달여 먹어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이 벼락만 치면 먼저 그 나무를 찾으려고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 사이에도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때 먼저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려 있어도 낫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불치병자들이 모여 있다고 3절은 전해줍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긴 하지만, 그곳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울해 보입니다. 이곳의 병자들을 보면 대부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서로 이야기조차 나눌 정도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다들 누워 있습니다. 그곳에는 고통의 신음소리만이 나지막하게 들려 왔을 것입니다.

 

비록 돈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 조차도 의술로도 고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지붕이 있는 행각이 다섯이나 있어 상당한 병자들이 늘 그곳에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왕래는 거의 없는 외로움만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고 5절은 말해줍니다. 당시 남자들의 평균 수명을 45세로 조금 높게 잡아 보기 바랍니다. 그는 일평생을 병으로 앓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6절에서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래 동안 병마에 시달려 기력마저 상실해 활기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음을 전해 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 앉을 힘도 없어 누워있기만 했습니다. 너무 지쳐 있습니다. 그 역시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이곳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의 평생에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불확실만이 있는 곳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잔인한 곳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38년된 병자는 더욱 소망이 없음을 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다들 아파 이곳에 모였지만 생존 본능만은 여전 합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더 아픈 환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마음에서 잊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게 만듭니다. 가족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사람은 고아인지도 모릅니다. 부자 집 아들이지만 가족들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돌보던 사랑하는 가족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만약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한다면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낯선 곳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찾아온 것입니다. 요한은 여전히 예수님의 움직임을 소상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사역하던 갈릴리에서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어떤 명절인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으로 가지 않고 먼저 잃어버린 자들을 찾은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움직여서 동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찾지 않던 이곳에 제자들을 이끌고 주님이 친히 찾아오자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의사조차도 손 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래 전부터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방문조차도 끊어진 사람들입니다. 신앙 공동체 조차도 무관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7절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이곳에서조차 서로 경쟁해야만 하는 논리가 적용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38년 병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더 희망을 접고 절망하고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있는 캠퍼스나 직장에서의 경쟁 논리가 그대로 작동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주님이 왜 그 연못에 갔는지 설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두가 포기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아픔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을 보셨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아픔을 도와 주려고 반드시 찾아 오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힘들 때에 꼭 이 믿음을 잊어버리기 말기 바랍니다. 

 

지난 주도 앞으로도 병 고침에 대해 볼 것입니다. 이쯤에서 병 고침에 대한 이해나 태도에 대해 한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 병 고침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치유하고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적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불평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없다는 뜻도 됩니다.

 

이 말을 듣다 보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 필요 없다는 것처럼 들려옵니다. 믿음이 왜 필요하며 병 낫기를 구하는 기도가 왜 필요하냐고 물을 것입니다. 5:15-16절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믿음의 기도와 간구는 성경이 말해주는 병이 낫는 조건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치유가 안 되는 분이 있습니다. 또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안 나으면 기도한 그분들은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입니까? 또 간구가 너무 짧았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믿음의 기도다 아니다’ 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들어줄 만한 기도의 시간이 있었다 없었다’ 를 판단 못합니다. 사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접근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병 고침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미리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면 기도도 그만두고 그냥 시간 보내며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발과 질문에도 불구하고 치유에 대한 2) 우리 성도의 자세는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앞에서 본 야고보의 말처럼 병 낫기를 바라는 신앙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계속해서 기도하는 이유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은혜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내 뜻으로 구합니다. 하지만 계속 기도하다 보면 기도가 변하여 간구가 될 때는 하나님의 뜻으로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서 본 야고보는 ‘믿음의 기도’에서 나중은 ‘의인의 간구’라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울 사도입니다. 자신에게 병이 있어 낫기를 위해 세 번이나 간구합니다. 답은 ‘너에게 준 은혜가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만족하며 살라는 응답이지요.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로도 사용하겠다는 확실한 최종 결정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3) 자세는 주님의 마지막 응답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38년 된 병자 이야기를 실제로 한번 우리에게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질문은 혹시 내 병이 38년보다 짧으면 치유가 안 되는 것입니까? 게다가 이 사람이 병든 이유도 14절을 보면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단순히 죄 때문입니까? 

 

전부 아픈 것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치유에 있어서도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긴 바울 사도의 병도 낫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성경의 한 가지 예를 가지고 해석하고 나에게 적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 자세는 병에 관한 원인과 병이 낫는 이유에 관한 것을 말할 때 누구든지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성도들은 성경과 개인들의 경험까지 고려합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주의해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병 낫는 조건들을 전부 찾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서원을 했다, 물질을 드렸다,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등 수 많은 조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따라 하면 좋겠지만 현실이 문제입니다.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5) 자세는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들을 보고 그들의 조건들을 다 따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나는 그 사람처럼 안 했기에 또는 못했기에 안 낫겠구나’ 라고 미리 예단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은 못 고칠 질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갖기 바랍니다.

 

정말로 중요한 6) 자세입니다. 육신의 질병만 생각 말고,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큰 질병인 ‘죄’를 치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질병만 낫기를 원한다면, 진짜 치유 받아야 할 것은 잊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 중 아픈 분을 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해도 안 들어주셨는데 어느 날 깨달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병을 가진 본인이 예수를 영접하고 기도하여 병 고침의 체험을 직접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내 남편이나 아내나 형제나 심지어 자녀가 진정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음을 갖고 병 낫기를 주께 간구할 수 있는 믿음을 갖도록 기도해야겠지요.

 

그래서 그분은 그때부터 가정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응답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우리가 바라는 시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이 올 때까지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병 고침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 예외적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병자의 요청도 없었습니다. 그냥 주님이 죽을 것 같아 보이는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겨우 주님을 바라보는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다짜고짜 묻습니다. 사실 그는 이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도 안 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7절을 보면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도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고쳐 주십시오’라는 말 대신 그냥 자신을 도와주는 시종 드는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낫고자 하는 소망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13절을 보면 고침을 받고 난 뒤에도 자신을 고쳐준 사람의 이름조차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를 고쳐 줍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입니다. 그래서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장소에서 이 표적이 일어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 믿음조차도 없는 이런 사람에게도 병 고침의 자비가 흐른다는 것입니다.

 

왜 고쳐줄까요?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주님은 나중 성전으로 찾아가 그를 다시 만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의 병 고침은 한 개인의 구원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중이라도 그를 찾아가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 표적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타내 주는 기적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이 치유는 하필 안식일에 일어나 나중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16), 죽이고자 하는 말미를(18) 제공해 주었습니다. 안식일 보다 더 크신 주님이 안식일의 준수라는 율법에 메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분임을 선포해주고 있습니다.  

 

이 치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에게(사람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죽음이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소망이 말라버린 곳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지고 오십니다. 왜냐구요? 이 세상에서 절망보다 더 큰 사망의 죽음을 또 다시 그들이 맛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분이든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삶이 힘들어 정말 답답한지요? 절망감으로 밥도 안 넘어가는지요? 정말 죽을 만큼 힘든지요?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 사무실로, 연구실로, 실험실로, 불 꺼진 나의 방으로 찾아 오십니다. 사람들의 생각에서조차 잊혀진 나를 기억합니다.  

 

믿음 조차도 있는지 없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도 주님은 말을 건네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믿는 나에게도 찾아 오십니다. 믿는다고 고난이 없고 아픔이 없고 절망이 없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서 왕따 당한 누구에게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비를 허락하십니다. 이 믿음이 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 이런 하나님의 자비가 흐르기를 바라는 분들이 있는지요? “주님 내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자녀들, 형제들에게 이천 년 전 베데스다 연못에 흘러 넘쳤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할 때, 이미 주님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 가운데 강 같이 흘렀음을 고백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간구가 우리 입술에 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믿음이 생깁니다. 주님이 찾아 가기만 하면 주님의 이름도 모르던 그가 주님의 음성에 반응합니다. 이제 주님은 먼저 치유 받은 우리들에게 그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가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들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망이 너무 커서 사람 얼굴조차 보고 싶어하지 않는 깊은 상처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다가서기를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보다 앞서 찾아가 만나 주십니다. 소망을 주셔서 빛의 자녀가 되게 할 준비를 하십니다. 지금도 삶이 힘들고 마음이 아픈 모든 분들에게 베데스다에서 베푸신 은혜가 흘러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